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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에 등장 하였던 사람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10)

Views : 3,997 2016-07-27 11:34
자유게시판 12718232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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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에서 등장하는 인물들이 지금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궁금하지 않으세요?

 

오연호 - 오마이뉴스 창업 (발행인)

조유식 - 알라딘 창업 (출판 유통업 등)

이석기 - 전직 국회의원 (지금 깜방에서 열심히 좌빨 선전 중)

 

대표적인 사람들이 등장하는 민혁당 사건을 왜 이 시점에서 올렸을까 생각하세요?

그나마 유일하게 " 조작 " 운운하지 못하는 대표적인 사건이기 때문이지요.

 

간첩조작 사건으로 변명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유일하게 "민주화 운동 유공자"로 포장조차 불가능한 사건이지요.

여기서 등장하는 " 이석기"

 

문죄인이 청와대 있을 때

무려 2번씩이나 황당하게 구제 해 준 것 잘 아실 것이니.... 언급 필요 없을듯

 

엄청 길어요.

 

아래에 등장하는 이런 인간들로부터

이런 정신상태를 가졌던

좌쫌들로부터

나라를 지켜주는 수많은 애국자들이 매도되는 현실에서 지금 우리나라는 앞으로 나가고 있는 중입니다

 

재미있으니 시간 되실 때 한번씩 읽어 보셔도 됩니다. 

 

 

 

김영환은 김일성 만난 후 전향을

 

결심했다

 

북한은 관악산1호(김영환)가 조직에서 떨어져 나갔기 때문에 조직검열을 나간 원진우를 통해 관악산 2호인 하영옥한테 '네가 앞으로 전적으로 조직을 꾸려 나가라'는 의미로 광명성 1호를 붙인 것이다. 북한은 앞으로 이 조직에 포섭된 조직원들의 암호를 '광명성 시리즈'로 나갈 참이었다.

 

 


 

   '강 철 김영환’은 일반 국민들한테는 낯선 인물이지만, 이른바 386세대 즉 60년대에 출생해 80년대에 대학을 다닌 30대와 특히 80년대 중후반부터 10년 동안 대학 운동권을 휩쓸었던 주사파 학생들한테는 가히 ‘신화’ 같은 존재였다. 그러나 97년 10월 울산에서 검거된 남파간첩 최정남·강연정 부부 사건의 와중에서 중국에서 2년 가까이 머물던 그가 지난 7월말 홀연 귀국했을 때만 해도 그의 귀국이 어떤 파문을 몰고 올지는 아무도 몰랐다. 아니, 그의 귀국 사실 자체가 보안에 붙여졌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다.

그러나 그 귀국은, ‘월간조선’ 조갑제 편집장의 주선과 청와대 김중권 비서실장의 ‘보장’으로 성사된 국가정보원과의 ‘약속된 만남’이었다. 한때 ‘남한 주사파의 대부’였다가 90년대 중반부터 북한의 수령론을 ‘사기극’이라고 비판한 강철 김영환과, 남한 내 주사파를 색출하는 일을 본분으로 삼는 국정원 대공수사국 수사관들과의 그 예정된 만남은 그의 과거의 모든 행적을 검토하는 사상 심사를 의미했다. 서울 시내의 한 대공상담실에서 8월9일 상견례를 가진 양측은 8월13일부터는 시내 R호텔의 국정원 안가로 자리를 옮겨 세차례 더 만났다.

이 사건의 국정원 수사 책임자인 김쬎쬎 단장은 80년대 중후반 이른바 NL(민족해방) 운동 진영의 행동 지침서였던 ‘강철 시리즈’의 필자로서 주체사상을 전파하고 이후 10년간 학생 운동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이론가에서, 이제는 북한의 인권과 민주화를 촉구하고 북한 혁명(해방)론을 전파하는 ‘시대정신’(격월간)의 핵심 필자이자 이 잡지의 편집위원으로 변신한 그에게 최대한 자유로운 분위기를 만들어 주었다. 김단장은 심사를 받는 중간중간에 오랜만에 만난 시대정신 편집진의 귀국 환영 MT와 가족들의 회식에도 다녀올 수 있도록 배려했다. 목적은 단 한가지였다. 북한과 연계된 과거의 모든 행적을 숨김없이 낱낱이 털어놓게 하는 것이었다.

그에 대한 이념 전문가들의 사상 심사는 사실상 끝난 뒤였다. 북한 체제의 특성상 전향을 하지 않고서는 ‘수령의 가슴에 비수를 꽂는’ 그런 글을 공개적으로 발표할 수 없다는 것이 북한 연구가들의 공통된 의견이었다. 문제는 그를 통해 그의 ‘범죄사실’의 정도를 확인하고 이미 사건을 갈무리 해놓은 하영옥·심재춘 사건과의 관련 부분을 확정지어 털어버리고 마지막으로는 강철의 집에서 압수해 놓고도 오랫동안 풀지 못한 숙제였던 난수 해독용 책자 ‘나는 너에게 장미의 화원을 약속하지 않았다’라는 비수를 언제 들이대느냐 하는 것이었다.

김영환은 김단장의 예상보다 더 빨리, 더 많이 그리고 더 깊이 자신의 행적을 털어놓았다. 89년 반제청년동맹을 결성했고, 남파간첩 윤택림에게 포섭되어 91년 북한을 다녀오고 김일성을 두 차례나 만나 공작금 40만 달러를 받았고….

김일성을 두 번이나 만났다? 우선 숙제 하나가 풀렸다. 남파간첩 최정남으로부터 “90년대 초에 남조선 대학생 두명이 공화국을 찾아와 김일성 주석을 만나고 돌아갔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는 진술을 들었으나 그 두명이 누구인지를 끝내 알 길이 없었는데 해답이 나온 것이다. 어느 정도 예상을 했지만 예 상보다 ‘범죄사실’이 더 큰 ‘거물’이었다. 술술 잘 풀려 나갔다. 이때부터는 오히려 고민이 되었다. 전향했음이 분명하고 수사에 협조하는데 사법처리할 수는 없고 그렇다고 모든 행적을 덮을 수도 없는 문제였다.

그런데 사건이 엉뚱한 방향으로 튀었다. 그때까지 순순히 협조했던 김영환이 8월16일 돌연 월간 ‘말’지를 찾아가 자신이 국정원에서 진술했던 모든 ‘범죄사실’을 깡그리 부인하면서 오히려 국정원이 자신을 간첩단의 수괴로 한 대규모 조직사건을 조작하려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명백히 의도적인 수사방해였다. 강철은 국정원의 심사 과정에서 신변의 위협과 양심의 위기를 느꼈다고 고상하게 얘기했지만 국정원 입장에서 보면 “내가 지금 국정원에서 조직을 불라고 강요당하고 있으니 알아서 튀어라”는 신호였다. 강철은 이렇게 사건을 공개해 놓고 8월18일 홍콩으로 출국하려다 김포공항에서 체포됐다. 여기까지는 과거에 자신이 전파한 주사파 이론에 이끌려 발을 딛은 조직원을 보호하기 위한 고육지계로 이해할 수 있다.

 


“말지 인터뷰는 ‘튀어라’는 신호”

 

 

그런데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구속된 뒤에도 가족과 변호인을 통해 일부 언론에 고문 의혹을 제기하고 국정원이 실적주의에 사로잡혀 이번 사건을 대규모 간첩사건으로 확대·조작하려 한다는 ‘말’지 인터뷰에서 했던 주장을 되풀이했다는 점이다. 그러자 온갖 추측과 의혹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일까. 강철 김영환의 내심을 확인할 길은 없다. 그러나 처음부터 이번 사건에 개입한 한기홍씨(시대정신 편집·발행인)는 이번 사건을 둘러싼 몇가지 질문과 쟁점에 대해 이렇게 밝혔다. 한씨는 김영환씨와 함께 오랫동안 운동의 방향 전환을 모색했고 ‘시대정신’을 함께 창간해 편집 방향을 논의해 왔다는 점에서 사실상 김씨의 생각을 가장 정확하게 대변하는 셈이다.

“방북과 노동당 가입 : 김영환은 91년 북한공작원의 제의에 따라 조유식과 함께 방북하여 노동당에 입당했다. 당시 김영환은 북한은 주체사상이 구현된 사회이며 북한과 연계하여 남한혁명을 해야 한다는 입장을 갖고 있었던 만큼 그의 방북과 노동당 입당은 당시의 입장에서는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김영환은 언제부터 북한 사회와 맑스주의에 대해 문제의식을 갖기 시작했는가? : 김영환은 방북후 얼마 지나지 않은 92년부터 ‘주체사상과 북한체제는 분리해서 보아야 한다’, ‘북한정권이 민중들을 탄압하고 있다’, ‘맑스주의의 계급투쟁설, 프롤레타리아 독재론, 사적 유물론 등은 틀렸다’는 판단을 하는 등 인식의 변화를 겪게 되었다고 한다. 그의 인식의 변화는 그가 대부분의 논문을 썼던 반제청년동맹 기관지인 ‘주체기치’, ‘빛’ 등에서 그 증거들을 찾을 수 있다. 김영환이 95년부터(‘말’지 95년 4월호)공개적인 매체를 통해 자신의 변화된 생각을 말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92년 이후부터 반제청년동맹원들을 비롯한 주사파 핵심들을 대상으로 본인의 생각을 전파해나가는 사업에 착수한 것이다.

왜 김영환은 북한정권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가진 상태에서도 북한당국과의 관계를 유지했을까? : 김영환은 92년 인식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95년 말지를 통한 공개적 발언 때까지 북한과의 연계를 유지하였다. 이는 김영환이 주사파들을 설득할 수 있는 ‘시간 벌기’의 일환이었다고 판단된다. 만약 김영환의 입장 전환 사실이 북한에 알려지게 될 경우 북한이 가만있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북한은 일정기간은 설득(직접 사람을 보내는 등)하려고 할 것이며,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되면 반제청년동맹 지도부 중 자신들에 우호적인 다른 사람과 선을 만들고 나아가 보복을 시도할 것이다.

이와 관련 김영환의 대북 연락책인 조유식이 97년 초까지 북한과 연계를 지속했던 사실도 해명이 필요하다. 둘 사이에 의견 차이가 있어서 그랬을 가능성도 있지만 둘 사이의 오랜 친분관계를 고려하고, 조유식 기자의 ‘말’지 기사의 주제나 논조가 95년 이후 변화된다는 사실을 볼 때 둘 사이의 긴밀한 협의하에 이루어진 일로 관측된다. 결국 북한이 김영환의 변화에 대해 정확한 판단을 하기 어렵게 하고자 일정 기간 조유식은 북한과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고 보여진다. 조유식은 이런 사정 때문에 김영환과 달리 공개적으로 분명한 북한 비판 주장을 펴지 않은 것 같다.

왜 김영환은 조기에 공안당국에 자수하여 자유로운 상태에서 활동하는 길을 택하지 않았을까? : 만약 안기부가 김영환이 동료들을 설득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주면서 이 사건(반제청년동맹 포함)을 비밀 또는 불문에 부친다면 김영환은 이 길을 선택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당시에 이는 누가 보아도 불가능한 일이다. 안기부는 김영환의 이른바 전향의 증거로 관련 정보를 모두 넘길 것을 요구할 것이며 이에 따라 김영환 외의 다른 사람들을 사법처리하는 수순을 택하려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개인의 양심이나 명예의 문제를 떠나서 동료들을 설득할 수 있는 가능성을 아예 봉쇄해버리는 결과를 가져온다. 즉 안기부가 이 사건을 인지하여 사건화하는 순간 김영환의 새로운 운동구상 (주사파들을 설득하여 북한민주화운동 등 진정으로 이 사회의 발전을 위해 기여하도록 하는 것)은 큰 차질을 받게 된다.


김영환은 왜 귀국했는가? : 김영환은 97년 10월 최정남 검거 직후 본인이 난수표로 사용한 ‘나는 너에게 장미화원을 약속하지 않았다’는 소설책이 국정원측에 의해 압수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만큼 국정원이 자신의 북한과의 연계사실을 어느 정도 알고 있을 것이라는 판단을 갖고 귀국했다고 보여진다. 그렇다면 김영환은 ‘말’지 9월호 인터뷰에서 암시되듯이 국정원과의 협상을 통해 본인을 비롯하여 사건 관계자들의 사면을 끌어내려고 귀국한 것으로 보인다. 김영환은 국정원과 일종의 ‘과거 청산’을 시도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번 과정에서 밝혀졌듯이 국정원의 수사 실무자들은 김영환의 95년 이후의 활동을 순전히 위장이라고 단정하고 엄청난 사건을 파헤쳤다는 흥분에 들떠 있었다. 김영환은 국정원과의 대화에서 상식이 통하지 않자 자구책으로 ‘말’지와의 인터뷰, 방북사실 부인 등 강경대응을 한 것 같다.

김영환은 하영옥 등이 새롭게 북한과 연결을 가졌다는 사실은 모른 채 그들이 여전히 친북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지만 어차피 김영환 주도하의 활동에 참여한 만큼 노동당 가입, 반제청년동맹 활동 등에 대해 함께 사면을 받아내려는 구상을 한 것 같다. 하영옥 등이 새롭게 북한과 연결을 맺은 사실이 없다면 국정원 입장에서도 이른바 총책인 김영환을 사면하면서 이들을 사법처리하기에는 형평성 논란이라는 부담을 안게 된다.

김영환은 귀국후 국정원 조사과정에서 북한과 연결된 하영옥의 최근 활동을 국정원이 파악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되자 아주 곤혹스러워 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본인의 책임은 아니지만 여하튼 이미 자신의 손을 떠나버린 상황이 앞에 놓여 있다는 대목에서 많은 고뇌가 있었을 것이다.”

 


확대·조작 아닌 축소·방치 수사

 

 

김영환이 처했던 상황과 고민 그리고 선택에 대한 한씨의 의견은 국정원이 취한 사법적 판단(전향한 김영환·조유식 2인은 공소보류 의견으로 송치하고, 미전향인 하영옥·심재춘 2인은 기소 의견으로 송치)에 비추어 전체적으로 국정원의 판단과 크게 틀리지 않다. 그러나 국정원이 95년 이후의 활동을 순전히 위장이라고 단정하고 엄청난 사건을 파헤쳤다는 흥분에 들떠 있었고, 그래서 김영환은 국정원과의 대화에서 상식이 통하지 않자 자구책으로 ‘말’지와의 인터뷰, 방북 사실 부인 등으로 강경 대응을 한 것 같다는 한씨의 생각은 거리가 있다. 김영환 또한 체포 전 긴급 인터뷰(‘말’ 9월호)에서 국정원이 ‘실적주의’에 사로잡혀 사건을 무리하게 확대·조작하려고 한다고 유사한 주장을 했다.

그러나 나중에 밝혀진 결과는 강철의 주장과는 전혀 딴판으로 오히려 ‘축소·방치’한 느낌마저 준다. 국정원은 북한의 지령을 받는 지하당 조직의 조직표까지 입수하고 핵심 조직원들의 신상을 파악하고 있으면서도 이들이 자수해 오길 기다리는 ‘여유’를 부렸기 때문이다. 9월9일 국정원의 수사결과 발표 다음날 국정원에 자수 의사를 표명해온 박OO 변호사의 경우가 그것이다.

국정원은 김영환씨의 서울대 1년 후배로 김씨에게 포섭되어 노동당에 현지 입당해 ‘관악산 3호’라는 암호명을 부여받고 반제청년동맹 중앙위원으로 활동한 박OO 변호사에 대한 혐의점을 확보해 놓고서도 박변호사가 자수해 올 때까지 그를 한번도 조사하지 않았다. 수사발표일 며칠 전에 박변호사에게 전화를 걸어 국정원에서 조사받고 있는 김영환씨 간첩사건과 관련해 국정원의 조사를 받은 적이 있냐고 확인 요청을 하자 박변호사는 서클 1년 후배일 뿐 본인은 이번 사건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부인했다. 그러나 박변호사는 수사발표 이튿날 자수 의사를 표명했다.

9월9일 수사 발표장에서 만난 한 수사간부는 “두고 보십시오, 우리는 이번 조처로 과거에 북과 연계된 전력이 있는 사람들이 상당수 자수해 올 것으로 기대합니다”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국정원의 ‘고철 수집’작전이 시작된 셈이다.

그러나 과거 같으면 ‘상상할 수 없는 수사기법’이다. 조직표까지 그려 놓고서 조직원을 붙잡지 않는다? 또 국정원은 고문 시비를 피하기 위해 처음부터 철저한 증거 위주의 수사를 벌였다. 물론 결정적인 단서는 수사국 직원들이 ‘보물선’이라고 부른다는 98년 12월18일 여수 앞바다에서 격침한 반잠수정에서 나왔다. 이 잠수정이 여수로 침투한 것은 그전에 98년 11월 1차 접선 장소였던 강화도 해안으로 접근중인 공작선이 발각되어 도망감으로써 접선에 실패했기 때문이었다.

 


복귀 아닌 침투 중 격침으로 위장

 

 

한편 국정원은 이 반잠수정이 공작원을 대동 복귀중에 격침된 것임에도 마치 침투 중 격침한 것처럼 위장 발표케 함으로써 공작원을 여수까지 데려다 준 하영옥·심재춘과 북한의 대남 공작망으로 하여금 ‘불행중 다행’인 것처럼 여기도록 안심시켰다. 그런 점에서 이번 간첩사건은 합참과 국정원의 치밀한 ‘합동작전’의 개가인 셈이다. 보물선에서 건져올린 남파공작원의 유류품에서 나온 단서를 토대로 피의자가 변호인한테 “국정원의 증거가 완벽해 더 이상 자백하지 않을 수 없었다”라고 실토할 만큼 국정원이 증거 위주의 과학 수사를 한 점도 높이 평가받을 만하다.

김영환·조유식 2인에 대한 다소 파격적인 공소보류 결정은 형평성과 관련해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김대중 정부의 대북정책과 국가보안법 개폐 방침에 대한 국정원의 달라진 시각을 일부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이 사건의 수사 책임자도 두 사람에 대한 전향 판단과 반성문 말고도 현 정부의 대북정책과 국가보안법 사건의 신중한 사법처리 방침 등이 고려되었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 수사 책임자는 하영옥·심재춘 2인에 대해서는 남파간첩 원진우의 간첩활동을 직접 도와준 데다가 반성의 기미가 없기 때문에 기소 의견으로 송치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구속중 황장엽 만나 심경 정리

 

 

또 이 수사 책임자는 북한이 하영옥에게 김정일 아호인 광명성이란 암호를 붙인 배경과 전향 판단의 근거에 대해서 이렇게 밝혔다.

“하영옥이 비중있는 조직을 가진 ‘큰 선’이기는 하지만 광명성을 붙인 특별한 의미는 없다. 다만 북한은 관악산 1호(김영환)가 조직에서 떨어져 나갔기 때문에 조직검열을 나온 원진우가 관악산 2호인 하영옥한테 ‘네가 앞으로 전적으로 조직을 꾸려 나가라’는 의미로 광명성 1호를 붙인 것이다. 북한은 앞으로 이 조직에 포섭된 사람들에 대해 광명성 시리즈로 나갈 참이었다. 그래서 하부선인 심재춘에게는 광명성 91호를 붙인 것이다.

한편 김영환과 조유식은 구속중인 9월2일에 황장엽씨를 만난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번 사건을 수사한 국정원 대공수사국 김00 단장은 그 과정과 대화 내용을 이렇게 밝혔다.

“정확히 말하면 세 사람이 아니라 나랑 네 사람이 만났다. 그렇지 않아도 김영환이를 심사중일 때 황영감(황장엽)한테서 김영환이를 한번 만나고 싶다는 요청이 왔다. 황영감이 주체사상의 창시자인데 남한 ‘주사파의 대부’인 김영환이가 자기를 존경한다고 쓴 글을 보고서 만나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9월2일 황영감을 만나기 이전에 김영환과 조유식이 ‘조직(민혁당) 문제는 고민스럽다’면서 서로 의논할 시간을 달라고 했다. 그래서 서로 의논해서 좋은 방향으로 결정하라고 두 사람을 만나게 해주었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두 사람이 조직까지 전부 털어놓기로 결심하고선 황장엽씨를 한번 만나게 해 달라고 부탁을 했다. 그래서 본인들 심경이 착잡할 것 같아 황영감을 만나게 해주었다. 그 자리에서 무슨 특별한 얘기는 없었고 황장엽씨는 두 사람한테 과거를 정리하기로 결심을 한 것은 참 잘한 일이다, 국정원에서 선처를 해줄 것이다, 함께 주체사상에 대한 글도 쓰면서 반김정일 타도 투쟁을 하고 싶다고 했다.”

또 다른 수사 관계자는 “김영환은 자신이 그토록 존경하던 김일성을 만나고 나서, 즉 최초 밀입북 시점인 91년 이후부터 흔들리기 시작해 92년부터 북한 체제에 대한 실망감을 느꼈다고 한다”고 밝혔다. 그 말에 따르면 김영환은 그 이후 오랫동안의 고민과 공부 그리고 모색을 거쳐 95년부터 전향했다는 것이다. 결국 남한내 수많은 학생들을 ‘주사’의 세계로 이끌었던 강철 김영환은 김일성을 만나 자신의 신념이 흔들렸고, 주체사상의 창시자로서 ‘공화국’을 등진 망명객 황장엽씨를 만나 자신의 과거를 모두 정리한 셈이다.

 

 

 

 

 

[심층추적] 민혁당사건의 진상

 

국정원 대공수사단장


"앞으로 자수자 줄줄이 나올 것"

 

'장미화원'이라는 책이 두뇌난수용 책자라는 확증은 있었지만 당시에는 난수를 풀지 못했다. 그러다 여수 앞바다에서 반잠수정을 격침· 인양한 것을 계기로 수사가 급진전되었다. 우리는 그 반잠수정을 '보물선'이라고 부른다.

 


 

   가정보원이 이번 ‘민족민주혁명당’ 간첩사건을 처리한 방식은 과거 간첩사건에서 보여준 처리방식과는 확연히 다른 양상을 띠고 있다. 국정원의 민혁당 간첩사건 수사결과 발표에 따르면, 이 사건에 연루된 김영환씨 등은 ‘명백한 간첩’이다. 김씨는 91년 밀입북해 노동당에 정식 입당후 2주간의 ‘간첩 기본교육’을 받았다. 게다가 김일성 주석은 친히 이 남한 ‘주사파의 대부’를 접견해 남한에 주체사상을 널리 전파하라는 교시를 내렸고, 김씨는 40만달러가 넘는 거액의 공작금을 받아 ‘지하당’의 조직관리를 해왔다.

그런데 국정원은 이처럼 ‘똑 떨어지는 간첩’을 공소보류 의견으로 검찰에 송치한 것이다. 검찰의 최종 판단이 아직 남아 있지만, 간첩 잡는 전문가(국정원 대공수사국)의 의견을 존중해온 관례에 비추어 국정원의 공소보류 의견은 곧 사실상의 무죄방면인 셈이다. 국정원은 왜 이런 위험한 결정을 내린 것일까? 강철 김영환의 이른바 전향 여부를 심사했고, 이번 민혁당 사건의 수사 책임자인 국정원 대공수O단 김OO 단장을 인터뷰해 사건의 진상과 수사 비화를 들어보았다.

─이번 사건의 최초 단서는 97년 울산에서 체포된 최정남 부부간첩 사건으로 알려져 있는데 사실인가? (최정남은 97년 8월초 남한내 기존 조직인 고영복 전 서울대 교수·심정웅 서울지하철공사 동작설비분 소장 등에 대한 지도검열과 공작 대상자 포섭의 임무를 띠고 거제도 해안으로 침투해 두 달여 동안 활동하다 10월27일 체포됐다. 최씨는 그후 전향해 현재 국정원의 보호를 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최정남 사건을 최초 단서라고 할 수는 없다. 김영환은 그 이전 반제청년동맹(89년 3월 결성) 때부터 북한과의 연계 가능성을 주시해 왔다. 반청동이 펴낸 ‘주체기치’ 같은 유인물 분석을 통한 내사결과를 축적해 핵심 인물을 김영환으로 압축하는 과정에서 최정남 사건이 터진 것이다. 그때 당연히 우리로서는 최정남이 왜 하필 김영환의 이름을 댔는지 추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그때까지도 민혁당(92년 3월 결성)의 존재는 몰랐다.”

 


북한 역공작 가능성 전혀 없다

 

 

─97년 10월21일 남파간첩 최정남은 재야단체 간부 정모씨를 만났을 때 “김영환 선생 소개로 왔다”고 밝혔다. 그러다 정씨의 신고로 엿새 후인 10월27일 체포되었다. 그런데 김영환씨는 95년부터 공개적으로 북한 체제를 비판했다. 그래서 당시에도 남파공작원이 이름을 흘린 것이 북한의 ‘김영환 죽이기’가 아니냐는 일부 지적이 있었고, 이번 사건 초기에도 일부에서는 국정원이 최정남의 진술에 의존해 북한의 역공작에 말려든 것이라는 주장이 나왔다. 그럴 가능성은 전혀 없는가?

“전혀 없다. 북한의 역공작 가능성을 파악하는 것은 간첩수사의 기본이다. 최정남은 김영환이 (북한 공작망과) ‘물려’ 있는 것을 전혀 몰랐다. 아니 알 수가 없다. 북한의 대남공작 조직은 철저히 단선으로 연계되어 있다. 직접 연결된 라인이 아니고는 서로 모른다. 남파공작원들은 초대소에서 교육받을 때 서로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도록 대낮에도 우산을 쓰고 다니게 할 정도로 철저하다.”

─최정남은 왜 김영환을 팔았나?

“최정남의 남파 임무 중 하나가 새로운 공작 대상자를 포섭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최정남은 당시 재야 단체 기관지 ‘자주의 길’에 실린 정씨의 기고문과 김영환과의 대담논쟁 등을 분석해 나름대로 OO대 총학생회장 출신인 정씨가 사상적 토대가 확고한 인물이라고 평가해 포섭하기 위해 접촉한 것이다. 그런데 그냥 만나자고 하면 이상히 여길까봐 김영환의 이름을 판 것뿐이다.”

─그러면 97년 최정남이 안기부에서 조사받을 때 “김영환과 조유식 두 사람이 91년 평양에서 교육을 받고 돌아갔다”고 한 진술에 근거해 김영환의 간첩활동 혐의를 잡고 그를 귀국시켰다는 일부 보도는 어떻게 된 것인가.

“그렇지 않다. 최정남의 진술이 와전된 모양이다. 최정남은 김영환이 89년부터 대남 공작망과 물려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 다만, 나중에 조사하는 과정에서 최정남은 ‘90년대 초 남조선 대학생 두명이 (평양에) 왔다가 김일성을 만나고 간 적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라고만 진술했다. 그래서 누가 다녀왔는지 단서를 포착해 보려고 노력했는데 누군지 알아낼 수 없었다.”

─정형근 의원은 최정남이 체포되자 고영복 교수한테 “북경 북한대사관으로 급히 피신하라”고 전화로 알려준 사람이 김영환이라고 주장하는데….

“그렇지 않다. 최정남은 김영환이 (북한 공작망과) 물려 있는 것을 몰랐고 김영환 또한 최정남의 존재나 고영복 교수가 물려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 알 수가 없었다. 당시 전화를 건 사람은 이북 억양의 이원태라는 이름을 쓴 자였는데, 아직 못 잡았다. 우리는 고첩망(고정간첩망)의 일원이라고 보고 있다.”

─발신지 추적은 했는가? 혹시 중국이나 해외에서 온 전화는 아니었는가?

“당연히 발신지 추적을 했다. 그런데 당시에는 발신지 추적이 되는 전화와 안되는 전화가 있었다, 지금은 모든 전화가 다 발신지 추적이 되지만. 그 전화는 당시 발신지 추적이 안 되는 전화였다. 그래서 추적에 실패했다. 그러나 해외 전화는 아니었다.”

─최정남의 입에서 김영환 이름이 나오고 최정남이 검거됐을 때 김영환은 중국에 있었다. 그래서 자신의 밀입북 사실이 드러날까봐 중국으로 탈출한 것 아닌가? 김씨가 중국에 간 것은 도피인가 아니면 우연의 일치인가?

“우연의 일치이다. 우리가 출입국기록을 다 확인했다. 김영환은 97년 10월18일 출국했다. 최정남을 만난 정씨가 기자회견(10월21일)을 하기 전이다. 도피가 아니라 중국에서 무역업을 하는 처를 만나러 간 것이다. 그 전에도 처를 만나러 간 적이 있고 처는 지금도 중국에서 사업을 한다. 그런데 정씨가 기자회견에서 ‘최정남이 김영환의 소개로 왔다면서 북한에 함께 가자고 했다’고 밝히자 자신의 과거 행적이 드러날까봐 들어오지 못한 것이다. 도둑이 제발 저린 것이다.”

─그러면 최정남 사건을 계기로 당시 안기부가 입수한 김영환의 대북 연계 혐의를 입증하는 결정적인 단서는 ‘나는 너에게 장미의 화원을 약속하지 않았다’라는 난수 해독용 책자인가? 97년 11월 당시 안기부는 도청을 통해 그 책자가 난수 해독용 책자임을 알고 김씨 집에 대한 압수수색영장을 발부받아 책자를 압수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도청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최정남이 체포되고 나서 김영환이 자기 집에 있는 책을 없애라고 연락한 사실을 여러 수단과 방법을 통해 알아냈다. 그래서 우리가 김영환 집에 있는 수많은 책 중에서 ‘장미화원’ 책을 찾아낸 것이다. 그러자 김영환은 그 책을 압수해 간 사실을 알고 우리가 단서를 잡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들어오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그 책이 두뇌난수용 책자라는 확증은 있었지만 당시에는 난수를 풀지 못했다. 그러다 여수 앞바다에서 반잠수정을 격침·인양한 것을 계기로 수사가 급진전됐다. 우리는 그 반잠수정을 ‘보물선’이라고 부른다.”

 


청와대에 탄원서를 낸 이유

 

 

─지난 3월에 인양한 ‘보물선’에서 발견된 남파간첩 원진우(가명)의 유류품에서 수첩 말고도 다른 결정적인 증거가 있었나?

“일단 남파간첩의 수첩에 적힌 모든 전화번호(12개)가 ‘비산술식 덧셈’으로 변환된 피의자들의 연락처임을 밝혀냈다. 그러나 결정적인 단서는 김영환·조유식보다 하영옥·심재춘 쪽에서 먼저 나왔다. 하영옥·심재춘이 남파간첩(원진우)의 주민등록 등초본을 떼어준 증거가 확실히 나왔기 때문이다. 김영환이 귀국 탄원서를 내기 전에 하영옥·심재춘 건은 이미 증거 확보가 끝나 있었다. 그러나 ‘큰 건’을 잡기 위해 발표까지 늦춘 것이다.

그밖에도 보물선에서는 필름 2통이 나왔다. 바닷물이 들어가 부식된 사진 필름을 수차례에 걸쳐 복원해 현상해 보니 희미하게나마 윤곽이 드러나고 촬영 날짜가 찍혀 있었다. 98년 11월에 여수 돌산읍 해안가 등을 찍은 사진이 나왔다. 처음부터 심증은 있었지만 침투중인 간첩이 아니라 복귀중인 간첩이라는 것이 명백해졌다. 복귀 장소를 사전 답사한 것이다. 그래서 필름을 토대로 날짜 별로 행적 확인에 들어간 것이다. 그런데 주위 시선을 피하느라 차 안에서 사진을 찍었기 때문에 와이퍼나 윈도 브러쉬 같은 차량 부품과 차에 붙인 스티커 같은 것이 일부 사진에 찍혀 있었다. 그것을 근거로 차량을 추적·조회한 결과 하영옥의 하부선인 심재춘의 차라는 것을 확인했다.”

─수첩에서 전화번호를 파악하고 사건을 확정짓는 데 얼마나 걸렸나?

“3월18일 보물섬을 인양했는데 3월말까지 누구누구의 전화번호인지 다 확인했다. 이밖에 사진 분석으로 하영옥·심재춘 건은 먼저 사건을 확정했었다. 하영옥·심재춘 범죄사실은 남파간첩의 신분위장용 주민등록 등초본을 떼준 기록, 1차로 강화도에서 복귀를 시도할 때 김포─강화도간 기지국을 거쳐 통화한 휴대폰 통화기록과 강화도에서의 차량 검문 기록, 2차 복귀 장소인 여수에 심재춘의 차를 타고 사전답사 때 속도위반으로 찍힌 무인카메라 사진 같은 증거를 확보해 놓았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김영환에 대한 결정적인 증거는 없었다. 그러단 차에 중국에 있던 김영환이 7월초 가족을 통해 귀국 탄원서를 제출한 것이다.”

─청와대에 탄원서를 제출하기 전 국정원측과는 전혀 접촉이 없었는가?

“전혀 없었다. 우리는 하영옥·심재춘 사건을 다 확정해 놓고 ‘큰 건’이 걸리기만을 기다리고 있는데, 조갑제 ‘월간조선’편집장의 주선으로 김영환의 모친이 청와대에 귀국을 허용해 달라는 탄원서를 제기했고 청와대는 국정원에 처리 의견을 물어본 것이다. 그래서 국정원은 ‘김영환이 반제청년동맹 조직과 관련되어 있으나 본인이 ‘말’지와 ‘월간조선’ 등을 통해 김정일 타도투쟁을 주장한 것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다. 현재 국정원은 김영환에 대해 기소중지는 물론 출입국에 관한 어떤 조처도 취하지 않은 상태이므로 언제든지 들어올 수 있다. 다만, 집에서 두뇌난수 책자가 발견됐기 때문에 심사는 해봐야 하겠다’고 답신했다.”

─청와대 김중권 비서실장에게 탄원서를 내도록 주선한 조갑제 편집장은 김영환 귀국 문제와 관련해 국정원과 접촉이 있었나?

“없었다.”

─조 편집장이 이 사건에 개입한 이유는?

“특별한 이유는 없는 것으로 안다. 김영환에 관한 기사가 월간조선(6월호)에 실리고 나서 황영감 (황장엽씨)이 조갑제 편집장한테 전화해 김영환에 대해 관심을 보인 것으로 알고 있다. 그래서 조편집장은 기자의 욕심으로 김영환을 귀국시켜 황장엽과 대담을 붙이면 뭔가 그림이 될 것으로 보고 나선 것으로 보인다. 김영환이 밀입북한 간첩이라는 사실은 조갑제 편집장이 몰랐으니까.”

─김영환은 자신의 행적과 관련해 밀입북 및 지하당 구축 사실까지는 국정원이 모를 것으로 판단하고 귀국한 것인가?

“어느 정도 인지했을 것이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많은 책 중에서 하필이면 ‘장미화원’을 압수해간 사실을 알고 있으니 본인도 어느 정도 판단했을 것 아니가. 탄원서를 낸 것도 뭔가 꺼림칙한 구석이 있어 그런 것 아니겠는가.”

─김영환이 귀국해서 구속되기 전까지 네 차례 국정원의 심사를 받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자신의 과거 행적을 다 진술했는가?

“첫날부터 다 진술했다. 밀입북해 김일성 만난 사실까지 다 진술했다. 다만, 처음에는 ‘본인 것’만 얘기하겠다고 했다. 8월9일부터 16일까지 네 번 조사했다. 한 번은 시내 대공상담실에서, 세 번은 호텔에서 했는데 분위기는 자유로웠다.”

─호텔에서 조사할 때 본인 몰래 녹음한 것은 수사기법인가?

“녹음했는지 안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심사과정에서 우리 수사관이 녹취한 것은 사실이다. 보고 있는 옆에서 적었다. 중요한 것은 본인이 사실대로 진술했는데 우리가 없는 사실을 있다고 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그런데 왜 김씨는 네 번째 심사를 마치고 ‘말’지를 찾아가 “밀입북한 사실이 없는데 국정원이 간 첩사건을 조작하려 한다”는 취지의 인터뷰를 하고 홍콩으로 출국하려 한 것인가?

“김영환은 자신의 사상전향 배경을 ‘말’지에도 공개했고 우리한테도 밝혔지만 납득이 안 되는 대목이 있었다. 그런데 난수풀이용 책자 ‘장미화원’을 들이대니 김영환은 ‘아차, 이게 아니구나’ 싶었던 모양이다. 두뇌난수 전문이 다 풀려 조직표까지 나오고 하니까 위기감을 느낀 듯하다. 자신을 따르던 조직원들로부터 배신자 소리를 들을까봐 고민했던 것이다. 그래서 자기딴에는 머리를 굴리다 ‘말’지를 찾아간 것이다. 그런데 사실 우리도 김영환을 어떻게 처리할지 고민중이었다. 그런데 튄 것이다.”

 


김영환의 ‘이중플레이’

 

 

─구속 초기에는 진술을 거부했고 일부 언론은 고문 가능성도 제기했는데, 변호사 접견기록을 보면 그런 것 같지 않던데…

“구속되고 나서 처음에는 자기도 괴롭다고 진술을 거부했다. 그러나 네 차례 심사과정에서 만난 수사관들과 다시 만나, 호텔에서 이미 다 말했는데 이제 와서 부인해 봐야 뭐하겠냐며 ‘말’지에 거짓말하고 도망간 것에 대해 사과하고 다 진술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보니 구속중에도 우리한테는 다 진술해 놓고 가족이나 변호사한테는 진술을 강요당했지만 진술하지 않은 것처럼 얘기했다. 그래서 민변 변호사들도 구속 초기에는 우리가 없는 사건을 조작하려 하는 것으로 오해했으나 나중에는 본인들이 사실대로 다 자백한 것을 알고 허탈해 했다.”

─두 사람은 과거 행적에 대한 반성문도 썼는가?

“김영환·조유식은 썼고 하영옥·심재춘은 검찰에 송치할 때까지 쓰지 않았다. 두 사람은 아직 ‘미전향’인 셈이다.”

─김영환의 연락책이었던 ‘말’지 기자 김경환과 한때 ‘반청동’ 중앙위원이었다가 자수한 ‘박모’ 변호사는 어떻게 되는가? 또 다른 자수자도 있는가?

“김경환 기자에 대해선 오늘(9월13일) ‘연장’(구속기간 10일 연장 허가)이 떨어졌다. 이제 절반 했으니 더 해봐야 안다. 신동아 10월호가 발간되기 전까지는 사법처리 문제가 결정되지 않을 것이다. 박변호사는 본인이 자수했고 개인사정도 있고 해서 내일(9월14일)부터 조사하기로 했다. 자수한 사람들은 최대한 관용을 베풀기로 했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앞으로 자수자가 줄줄이 나올 것으로 기대한다. 예상자로는 박모 변호사뿐 아니라 ‘김모’, ‘이모’씨도 있다. 자수자의 신원은 프라이버시를 고려해 공개하지 않을 방침

이다.”

 

 

 

 

 

[심층추적] 민혁당사건의 진상

 

'민혁당 피의자 4인 접견록'

 

4인 접견록에 의하면 강철 김영환은 국정원에서 자신의 범죄 사실을 자백했으면서도 가족과 변호인 앞에서는 "가혹행위에 의한 허위자백이었다"는 애매모호한 태도를 취함으로써 '혁명가'로서의 이미지와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다.

 

  


 

   난 8월18일 강철 김영환씨가 간첩혐의로 김포공항에서 긴급 체포되자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은 그 어느 때보다도 신속히 대응했다. 민변으로서는 당연한 대응이었다.

우선 김씨가 체포된 직후에 발간된 월간 ‘말’지 9월호 인터뷰 기사에서 김씨는 자신이 국정원에 의해 겪고 있는 심각한 신변의 위협과 양심의 위기를 호소했다. 김씨가 체포되기 직전에 월간 ‘말’지를 찾아가 인터뷰를 자청해 실린 기사에 따르면, 김씨는 8월13·14·16일로 이어진 국정원의 사상 전향 심사 과정에서 옛 동료들을 배신해야 되는 상황으로 치닫는 데 따른 양심의 위기와 국정원이 자신을 간첩단의 수괴로 몰아가려는 데 따른 신변의 위협을 심각하게 느끼고 있다는 것이었다. 국가 공권력에 의해 신변위협과 양심의 위기를 느낀 경우 이런 식의 호소를 하는 사례는 과거에도 적지 않았다.

게다가 민변은 김대중 대통령의 국가보안법 개정 발언 이후 양심과 표현의 자유를 위협하는 국가보안법의 개폐(改廢)에 총력을 기울이기로 이미 내부적으로 총의를 모은 상황이었다. 따라서 일부에서는 김영환씨 사건은, 민변과 재야 시민·인권운동 단체들의 국가보안법 철폐운동에 위기감을 느낀 공안·수사 당국이 이 운동에 찬물을 끼얹기 위해 의도적으로 사건을 확대·조작했거나 적어도 타이밍을 맞춘 것이 아니냐는 의혹을 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민변은 기존의 ‘국가보안법 연구팀’에 소속된 변호사들을 중심으로 자연스레 강철 사건에 대한 대응책을 마련하게 되었다. 국가보안법 연구팀은 백승헌 변호사를 비롯해 16명으로 접견팀을 짜서 8월19일부터 김영환씨 등 민혁당 사건으로 구속된 피의자 4명이 검찰에 송치될 때까지 20일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접견을 했다. 국정원의 무리한 사건 확대·조작과 그 과정에서 흔히 있을 법한 고문· 가혹행위를 예방하기 위한 일종의 ‘접견투쟁’이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강압에 의한 사건 조작과 고문 의혹 등이 일부 언론을 통해 제기되기도 했다.

 


고문·가혹행위 없었다

 

 

그러나 ‘신동아’가 입수한 변호인 접견기록과 수진(受診) 보고서에 따르면, 그와 같은 주장은 별로 설득력이 없음을 알 수 있다. 그보다는 오히려 김영환씨 등 일부 피의자들이 국정원의 수사과정에서 한 진술 내용과는 정반대의 진술을 접견 변호인들에게 함으로써 변호사들의 ‘접견투쟁’을 무력화시킨 측면이 적지 않다. 또 접견기록에 따르면 자신이 자청해서 한 인터뷰 내용을 기자가 잘못 듣고 적은 것이라며 부인하기도 했다. 일종의 확신범인 피의자들의 진술이 증거 앞에서 어떻게 바뀌는지를 잘 보여준다 하겠다. 다음은 일자별로 정리한 접견내용.

8월19~20일

김영환씨 접견 내용:혐의사실의 골자는 △89년 국내에서 북한 공작원으로부터 포섭되어 △91년 조유식과 함께 밀입북해 △그후 반제청년동맹을 조직해 활동했다는 것인데 국정원은 객관적 증거는 제시하지 않음. 수사관들은 호텔 등지에서 조사할 당시 본인의 진술을 녹음했다면서 추후 증거자료로 사용될 것이라고 말함. 피의자 신문조서는 작성했지만 그 내용은 수사관이 ‘말’지 9월호 내용대로 질의하고 김영환은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는 형식임. 고문 및 가혹행위는 없고 다만 잠을 계속 자지 못하였다고 함.

조유식씨 접견 내용:혐의사실은 △91년 5~6월경 김영환과 밀입북해 북에 포섭되어 그 이후 현재까지 미국 등 해외에 드나들면서 북한 공작원과 접촉하고 북한측과 무선교신하며 고정간첩 활동했다는 것인데, 본인은 혐의사실을 모두 부인하고 있고 국정원 수사관들은 객관적 증거를 제시하지 않은 채 조씨의 자백을 추궁중. 고문이나 가혹행위는 없다고 진술.

하영옥씨 접견 내용:혐의사실은 김영환으로부터 설득당해 함께 간첩·조직활동을 했다는 것이고 고문 및 가혹행위는 없음.

심재춘씨 접견 내용:혐의사실은 특정인의 부탁으로 원진우라는 사람의 주민등록등본과 호적등본을 발급받아줌으로써 그에게 협조했다는 것인데, 심씨는 예전에 신림동에서 낯모르는 사람으로부터 부탁을 받고 주민등록등본을 발급받은 사실은 있으나 호적등본은 발급해준 사실이 없고 그 사람의 신원도 모른다고 함. 이에 국정원은 주민등록·호적등본 발급신청서의 필적이 동일하다는 내용의 국립과학수사연구소 감정서를 제시하고, 간첩으로부터 입수한 것이라며 수첩에 심씨 집 전화번호와 심씨 부인의 예전 삐삐번호가 암호 형태로 기재되어 있다면서 자백을 종용. 고문 및 가혹행위는 없다고 함.

8월21~23일

피의자 김영환:혐의사실은 △89년 7월경 북한 공작원에게 포섭 △91년 월북해 간첩교육을 받은 후 현재까지 북한의 지령을 받아 활동했다는 것인데 잠수정에서 결정적 증거가 나왔다고 함. 구속되기 전에 조사(대공상담소 및 R호텔)받을 때 수사관들이 녹음한다는 말을 안했는데 국정원에 들어와 보니 녹음했다고 하는데 증거능력이 있는지 물음. 당시 녹음한 진술에 불리한 내용이 있으나, 그 내용을 밝히기는 곤란하다고 함. 현재 묵비권을 행사중이고 일부 신문조서는 서명 날인 거부. 8월18일 첫날 철야조사 이후 평균 4~5시간밖에 못잤고 22일에는 하루종일 기합받았다고 함.

피의자 조유식:수사관들이 김영환의 체포 전 진술 녹음테이프와 비디오테이프도 있다고 하며 김영환이 진술한 녹음테이프를 일부 들려주었는데 녹음 내용이 김영환의 진술임은 맞는 것 같다고 함. 잠은 8월 20일만 서초경찰서에서 자고 그 외는 국정원에서 잤다고 함.

피의자 하영옥:혐의 내용은 김영환의 진술을 근거로 △김영환을 통해 간첩 활동했으며 △김영환이 노동당에 입당시켰으며 △돈도 받았다는 것임. 그밖에 △남파 간첩 원진우의 부탁으로 주민등록등본을 떼어주고 △98년 12월18일 승용차로 북한 공작원 원진우를 여수에 실어다 주었다면서 잠수정 유류품에서 나온 주민등록 발급신청서 등을 증거로 제시함. 본인 진술은 지나가는 아저씨가 초본을 떼어달라고 해 대신 신청했을 뿐 그외는 전부 부인하고 있음.

피의자 심재춘:혐의사실은 △98년 12월경 남해상에서 격침된 반잠수정으로 침투한 간첩 원진우의 부탁을 받고 △원진우의 주민등록등본(12.12)과 호적등본(12.14)을 떼어주고 역시 반잠수정에서 발견된 수첩에 피의자의 집 전화번호와 처의 삐삐 그리고 주민등록등본 발급신청서에 찍힌 도장과 주민등록등본, 호적등본 등이 원진우의 유류품에서 발견되었다는 것임. 그밖에 98년 11월20일경 김포 쪽으로 들어온 잠수정과 김포-강화 사이의 기지국을 통해 휴대폰으로 통화한 흔적이 있다는 것임. 본인은 혐의사실을 모두 부인. 원진우도 모른다고 함.

 


김영환의 혐의 시인에 실망한 조유식

 

 

8월24~25일

피의자 김영환:‘말’지 인터뷰 내용도 일부 부인(반제청년동맹이 실제로 활동한 것처럼 기사화한 것은 기자가 잘못 듣고 한 것이지, 실재하지 않았던 조직이란 취지). 수사진은 위협보다는 회유를 시도중이나 협조 거부 의사를 밝히고 계속 묵비와 부인으로 일관중.

피의자 조유식:91년 행적 중심으로 신문. 입북, 무선송신, 연락담당, 관철봉, 드보크, 공작금 관리, 해외에서 간첩 김철수 접선 등이 R호텔에서 김영환의 진술에 의한 것이라며 추궁중이나 혐의사실 모두 부인중.

피의자 하영옥:반제청년동맹 및 민족해방혁명당의 조직 문제와 간첩행위 등 모두 부인. 조직과 관련된 증거는 김영환의 진술뿐 인 듯하다고 함. 반제청년동맹·민족민주혁명당 조직과 간첩의 연계를 추궁하고 구체적 이름도 등장하는데 김영환의 진술 내용에 근거한 것으로 보인다고 함.

피의자 심재춘:하영옥의 소개로 98년 9월 간첩을 만나 그 이후 영장에 기재된 바와 같은 간첩 방조행위는 사실이라고 자백했다고 함. 국정원이 제시한 증거자료가 너무 완벽하고, 피의자의 변명이 합리성이 없다고 보여 자백하게 된 것이라고 함. 반청동·민혁당 조직과 관련해 다른 사람들의 이름을 확인해줄 것을 요구했으나 거부했다고 함. 수사관들은 직파간첩을 설명하려면 조직이 등장할 수밖에 없다고 하며 따라서 앞으로는 조직에 대한 수사 가능성 있음.

8월28일

피의자 김영환:영장상의 혐의사실(공작원과 접선, 조유식과 밀입북, 공작금 수령, 북한과 교신한 점 등)을 인정하는 조서에 날인한 것은 사실이며, 가혹행위에 의해 날인한 것이라고 함. 이에 관한 특별한 증거는 없고 암호 해독용 책(장미화원)이 유일한데 실제로는 암호해독용 책이 아니라고 함. 잠은 4시간 이상 자는데 평상시에는 다리를 높은 곳 얹고 엎드려뻗치기, 엎드려뻗쳐 한발 들고 서 있기, 벽에 손 얹고 비스듬히 서 있기 등의 상태에서 자세가 흐트러지면 배나 옆구리를 발로 채인다고 함.

피의자 조유식:현재까지 모든 혐의사실 부인중. 김영환이 혐의사실 시인하는 내용의 조서에 날인했다는 말 듣고 매우 실망하며 김영환이 이 정도의 고문을 이기지 못한 것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함.

피의자 하영옥:98.10 간첩 원진우와 만나 11.19 밤 12:00경 강화도 통해 입북 시도했으나 실패했고, 원진우와 본인이 심재춘에게 연락해 차를 가지고 오라고 한 후 심재춘의 차를 타고 서울로 돌아오다 검문당한 사실이 있고, 강화도에 무전기를 숨겼고, 본인의 진술로 국정원이 관악산에서 무전기를 찾았고, 인터넷을 통해 북한과 통신 연락한 것 등을 시인했다고 함.

그밖에 반청동 중앙위원 김영환·하영옥·박금섭이 각각 관악산 1·2·3호이고 박금섭도 노동당 입당했고, 북한으로부터 약 4억원을 김영환이 받아 자신이 김영환으로부터 2~3달에 1회씩 200~300만원 받은 사실에 대해 김영환의 진술을 보고 자신도 시인했다고 함. 민혁당에 대한 수사가 예상되고 수사관들이 민혁당 관계자로 최○수, 이○기, 김○원 등의 이름을 거론하는 것을 들었다고 함.

피의자 심재춘:98년 12월17일 원진우가 여수 통해 복귀시에 여수까지 데려다 주고, 그 이전에 원진우가 여수에 가서 침투지역 정찰을 실시할 때 같이 갔으며 원진우와 함께 무전기 가져온 사실 등 자신과 관련된 혐의 대부분을 시인했으며 관련 증거로는 휴대폰 발신 내용, 사진 등이 있다고 함. 가혹행위는 없었으며 잠도 잘자고 건강한 편이라고 함.

8월29일

접견 경과:어제 강금실 변호사와 김영환의 모친이 김영환이 가혹행위를 당했다고 주장해 급하게 접견을 부탁받음. 상처가 있다고 해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인의협)에 연락해 공동대표 정일용(일반외과)과 접견 신청. 국정원 담당자가 나와서 일요일 수진 신청은 곤란하며 주중에 연락하겠다고 함. 항의했지만 접견만 허용하고 수진신청은 거절함.

김영환 조서 기재내용:조유식 관련 부분과 하영옥의 입당 부분에 대해 일부 인정하는 것으로 되어 있음.

가혹행위 여부:김영환은 8월26일 조서 날인 거부를 이유로 양쪽 정강이 채여 빨간 피멍이 들어 있다고 함. 이와 관련 안기부 의사가 소견서 작성한 것을 보여줌. 소견서는 경미한 정도의 긁힌 상처로 돼 있음. 조유식은 기마자세로 서 있으라고 하면서 자세가 안나오면 무릎 안쪽을 발로 채여 멍이 들었다고 함.

8월30일

피의자 김영환:최초의 허위조서는 노동당 관련 진술만 했고 박금섭 관련이나 공작금 관련 진술은 자신이 한 것 아니라고 함. 최초 허위조서 작성 이후 전혀 조서 작성하지 않음.

피의자 조유식:피의자 신문조서는 5회 정도 작성. 계속 모든 혐의 부인중. 일부만 시인하라며 타협도 요구한다고 함. 피티체조, 팔굽혀펴기, 누워서 목이나 다리들기 같은 체벌을 시키는데 하지 않으면 따귀나 가슴을 때린다고 함.

피의자 하영옥:‘말’지 김경환 기자에 대해 원진우를 소개해준 인물이 아니냐며 지속적으로 질문해 본인은 모른다고 대답함. 수사가 민혁당으로 옮겨가고 있는데 이에 관해 진술하지 않고 있음. 다만 △민혁당이 92년 만들어졌으며 △김영환 하영옥 박금섭이 민혁당 중앙위원이며 △조유식은 관련 없다고 진술했다고 함. 민혁당 조사는 8월28일부터 시작했는데 수사관은 33명 정도만 알려달라며 회유하기도 했다고 함. 수사관들은 민혁당 및 반청동 관련자 이름을 최소 10명 이상 꿰고 있는데 울산에서 활동하던 김○일이라는 사람을 아는지 슬쩍 떠보고 이○기 최○수 김○원 임○열 등을 거론하고 김경환은 관모봉 (암호명)이라고 함. 주로 김영환의 진술을 제시하며 추궁하고 있고 김영환의 전향이 위장 아닌지를 물어 보았음. 가혹행위는 없으며 서초서에서는 5~6번 잤음.

 


멍과 피하출혈 보이지 않아

 

 

8월31일 당직변호사 접견 및 수진 보고서

경과:접견 및 면회 통해 김영환 조유식 하영옥에 대한 가혹행위 의심. 8월29일 백승헌 변호사의 접견 및 수진 신청이 국정원 수진 거부로 준항고 제기. 금일 5시경 의사 대동하고 오면 수진 허가해주겠다고 국정원에서 통보해와 이에 김영환 조유식에 대해서만 접견 및 수진 신청.

수진절차 및 결과:인의협 정일용 선생 말로는, 들어가니 국과수(국립과학수사연구소) 소속 의사 1인과 국정원 자체 의료원장 등 2인의 의사가 대기중이었고 이들과 함께 수진 진행함. 수진절차는 비교적 상세히 진행되었으며 문진도 충분히 했다고 함. 그 결과 김영환은 허리, 목의 통증을 호소하고 정강이 부분에 염증으로 인한 상처 있으나 멍·피하출혈이 든 것은 아니었음. 다만 염증은 외력으로 인한 외상인 점은 분명하다고 함. 조유식은 무릎 뒷부분에 피부병 흔적이 있는데 멍·피하출혈은 아니었고 외력으로 인한 외상으로 볼 수 없다고 함. 김영환·조유식에 대한 접견 보고서에 의하면 가혹행위의 주된 양상은 직접적인 외력을 가하는 것이 아니고 원산폭격 피티체조 등이었던 것으로 보아 외력으로 인한 상처를 확인하기는 어려웠던 것으로 보임.

접견 결과:김영환은 5회 분량 피의자 신문조서 무인한 이후 진술서 작성을 강요받고 있으나 현재 거부중. 조유식은 혐의 일체 부인중.

9월2일

피의자 김영환:호텔서 밝힌 이후 강제 날인한 조서의 기재부분은 △반청동은 88년 4월경 결성하고, 민혁당은 92년 3월 결성했으나 97년 중반 자체 해산선언했다. △그런데 하영옥 등 일부가 이에 불복해 계속 활동해왔다고 함. 조직 그림표에 관해서는 김영환과 하영옥 그리고 박금섭이 민혁당 중앙위원(모두 입당)이고, 그 아래 각 지역책임자들과 각 부문책임자들인데 그 명단은 20~30명 정도(가명 포함)임. 정○용, 홍○표, 김○원, 김○덕 등이라고 함. 김경환은 공작원과 본인 사이에 연락을 담당했다고 함. 국정원은 현재 김영환에게 “본인이 수사에 협조하면 조직 그림표에 있는 나머지 사람들은 사법처리하지 않겠다”고 회유한다고 함.

피의자 하영옥:박금섭 부분은 “관악산 3호이고, 입당했고, 본인과 김영환 및 박금섭 3인이 민혁당의 중앙위원”임을 시인했다고 함. 민혁당을 집중 조사중인데 이미 조직 그림표가 다 그려져 있고, 전국 조직인데 각 지역 책임자급과 각 부문책임자급이 모두 나와 있고, 조직의 최하 말단까지 나올 정도로 상세히 그려져 있고, 규모는 17명이 훨씬 더 넘는데 대부분 실명으로 되어 있고 일부는 가명이었다. 그 그림표를 보여주었는데 김영환의 필체로 작성된 것으로 보이며 다만, 96년경의 조직 그림표인 것 같았으며 이를 인정했다고 함. 오늘은 김경환에 대해 집중 조사했는데 김경환이 ‘관모봉’으로 원진우와의 연락을 담당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는데 이에 대해선 모두 부인했다고 함.

피의자 심재춘:공작원과 연계 부분(만난 사실, 나중에 안 사실, 차로 데리고 다닌 사실 등)에 관해 초기에는 부인했으나 이후 시인했다고 함. 최근에 반청동과 민혁당 조사중인데 국정원은 민혁당을 반청동의 후신으로 파악하고 북한 공작원(원진우)이 조직 점검차 입국한 것으로 보고 있으며 “민혁당의 조직 체계를 내놔라”고 했지만 이에 대해 모르는 사실이라며 부인했다고 함.

 


혁명가의 도덕성

 

 

9월4일

피의자 김영환:이미 호텔에서 모든 것을 밝혔으나 다른 관계자에 대한 피해를 염려해 진술을 거부했다. 이미 활동과 조직 전모가 드러난 이상 대국적 견지에서 모든 것을 투명하게 밝히고 잘못된 부분은 반성을 하고 새롭게 시작하겠다고 결심했다고 함. 90년초 방북, 민혁당 조직 등 모든 사실 시인했고 이는 호텔서 이미 밝힌 사실이며 민혁당은 92년 결성해 97년 8월 해산 선언했으나 하영옥이 이를 거부하고 일부 조직을 유지해 왔고, 민혁당에 관한 물적 증거 등은 없으며 국정원에서는 아직도 위장전향 여부를 묻고 있으나 본인은 진심이라고 함.

피의자 조유식:모든 사실 밝히고 국민의 심판받겠다는 입장이다. 그동안 진술을 거부한 것은 다른 관련자들에게 피해를 막기 위한 것이었으나 이미 활동, 조직 전모가 드러난 이상 대국적 견지에서 모든 것을 투명하게 밝히고 잘못된 부분은 반성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고 있다고 함. 90년 초 김영환과 함께 입당해 해외에서 간첩과 접선한 내용 등 영장 기재사실을 모두 시인했으며 국정원은 공소 보류 및 관련자 처벌 보류를 약속했으나 이를 신뢰하지는 않는다고 함.

한편 9월4일 체포되어 구속영장이 발부된 ‘말’지 김경환 기자에 대한 서울지법의 영장실질심사에서 김기자는 처음부터 영장 기재사실을 모두 시인했다. 김영환을 통해 노동당에 입당하고 암호명(관모봉)을 부여받아 김영환과 북한 공작원 사이의 연락책으로 활동해온 김기자는 90년대 북한과 관련된 행동은 잘못된 것으로 반성하고 있다고 진술했다. 또 그는 이미 과거 90년대 북한과 연계돼 활동한 일에 대해서는 언젠가 법적인 절차를 통해 정리해야 한다고 생각해 왔기 때문에 굳이 도주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고 진술했다. 김기자는 그러나 김영환의 대북 연계 혐의를 잘 알고 있으면서도 김영환이 자청해온 ‘말’지 긴급 인터뷰건에 대해 아무런 조처를 취하지 않음으로써 ‘말’지의 신뢰도에 큰 타격을 입혔다.

특히 김영환은 이미 국정원 조사과정에서 자신의 범죄사실에 대해 자백했으면서도 가족과 변호인 앞에서는 ‘자백을 강요중이나 진술하지 않고 있다’거나 ‘가혹행위에 의한 허위 자백이었다’는 식으로 애매모호한 태도를 취함으로써 한때 명성을 날렸던‘혁명가’로서의 도덕성에 큰 상처를 입게 됐다.

 

 

 

 

 

 

[독점인터뷰] 전향한 주사파 대부 '강철' 김영환의 육성고백

 

"김일성도 주체사상 모르더라"

 

한때 '남한 백만 학도중 10만 주사파의 대부'였던 강철 김영환이 10월 7일 검찰의 공소보류 결정으로 풀려났다. 91년 밀입북해 김일성을 두번이나 면담한 이 '거물 간첩'이 김정일 타도 투쟁 전선에 서기까지의 과정을 그의 육성고백을 통해 들어보았다.

 


 

  난 97년 10월 울산에서 체포된 최정남·강연정 남파 부부간첩 사건을 계기로 중국에서 2년 동안 체류하던 김영환씨가 극비리에 귀국한 것은 지난 7월말이었다. 그전에 김씨는 정부 당국에 귀국 탄원서를 냈었다. 귀국후 김씨는 서울 시내 R호텔의 국정원 안가(安家)에서 국정원 베테랑 대공수사관들로부터 이른바 ‘사상 전향 심사’를 받았다. 한 인간의 과거 모든 행적과 내심까지를 샅샅이 살피는 치열한 심사였다. 그런데 4차례의 국정원 조사에 협조했던 그는 느닷없이 8월18일 홍콩으로 출국을 시도하다 김포공항에서 간첩 혐의로 체포되어 구속 수감되었다.

그는 50일 동안의 구속 수사 끝에 공소보류 조치로 풀려났지만 여전히 자유롭지 못한 상황에 처해 있다. 국정원과 검찰이 매달아 놓은 공소 보류라는 ‘꼬리표’ 때문이라기보다는 앞으로 그가 전념하기로 작심한 ‘북한 민주화운동’과 ‘김정일 정권 타도 투쟁’ 같은 과업이 불러올지도 모를 신변의 위협 때문이다. 그 또한 국정원 관계자와 가족 그리고 몇몇 ‘동지’들 말고는 아무에게도 자신의 휴대폰 전화번호를 알리지 않을 만큼 신변 보안에 신경을 쓰고 있다. 이런 처지에 있어 ‘주거 부정’한 그를 수소문해 직격 인터뷰했다. 구속에서 풀려난 지 얼마 안된 상황이라 심리적으로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는 인터뷰였지만 그는 당대의 주체사상 이론가답게 자신의 심중을 담담하게 털어놓았다.

 


“구속되기 오래 전부터 전향했다”

 

 

-일단 구속을 면한 것을 축하드립니다. 그렇지만 그로 인한 심리적인 부담도 상당히 클 것으로 생각합니다. 우선 요즘의 심경을 좀 밝혀주시죠.

“국정원 조사를 받는 동안 관계가 나빠진 사람들 가운데는 제가 잘못을 범했거나, 특별한 잘못을 범하지 않았더라도 어쨌든 결과적으로 저 때문에 그렇게 된 사람이 있는데 그런 사람들한테는 사과를 하거나 아니면 그 사람들이 하는 일을 도와주거나 함으로써 풀어나갈 생각입니다. 그런데 그런 차원이 아니라 이번 일과 관련해서 이를테면 정치적인 이유로, 혹은 사상이 다르다는 이유 때문에 맹목적으로 저를 비난하는 그런 사람들과의 관계는 서로 간의 사상 문제가 해결이 안되면 근본적으로 해결이 안되는 것이라고 봅니다. ‘말’지와의 관계는 시간을 갖고 풀어나갈 생각입니다.”

-지난 10월9일 검찰이 공개한 반성문을 보면 91년 방북해 북한 사회의 경제적 낙후성과 주민통제를 보고 북한 체제에 실망을 많이 했고, 그뒤 강철환·안혁 등 정치범수용소 출신 탈북자들의 증언을 계기로 사상 전향을 결심했다는 대목이 나옵니다. 그런데 그때 이미 상당히 많은 탈북자들이 생생한 증언을 했었는데 이를 안기부의 사주에 의한 조작이라고 믿었던 운동권의 분위기가 이해가 안되던데요.

“저도 잘 이해가 안되지만 몇가지 배경이 있는 것 같아요. 우선 사람들은 자기가 믿고 싶은 것만 믿는 경향이 있고, 또 당파성이라고 할까, 자기들이 혁명 동지라고 생각하고 자기들이 지향하는 북한 체제를 옹호해줘야 한다는 의무감 같은 것이 작용하고, 그 다음으로는 지적 게으름 탓도 있다고 봐요. 그런 증언에 대해서 뭐가 옳은지 규명하려고 하지 않고 무조건 파묻혀 버리는 거죠.

-현재 남한내 주사파는 얼마나 됩니까.

“1000명 미만으로 보면 됩니다.”

-전향과 관련해서 그런 결정을 하게 된 특별한 계기나 일화 같은 게 있나요?

“그런 것은 없고, 저같은 경우 중요한 정보다 싶으면 비판적으로 분석하는 습관이 있어요. 정보를 제공하는 사람의 의도가 뭔지, 아니면 이게 조작된 것인지 등을 분석하는 습관이 있어요. 그래서 대학 다닐 때인 80년대 초중반에도 글에 정부 자료를 많이 인용하고, 북한 사회와 관련된 정보와 비교하고 그랬어요. 또 91~92년도에는 탈북자들 증언 등이 조작되었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분석해 들어갔어요. 결국 나름대로 분석한 결과 조작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판단이 들었어요.

그 이유는 우선 그 사람들이 어디에 감금돼 있는 사람도 아니고 풀려서 돌아다니는 사람인데, 한 두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남한 사회와 같은 조건에서는 조작이라면 언론에 의해 쉽게 드러날 것이고, 두번째로는 그 사람들의 주장이 아주 구체적이고 일관돼 있다는 겁니다. 특히 아주 짧은 거짓말이라면 모를까 상당히 방대한 분량을 가지고 있는 거짓말을 배우고 외어서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것이거든요.”

 


“북한의 수령론은 거대한 사기극”

 

 

-반성문을 보니까 “97년 중반에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과 함께 노동당을 동반 탈당했다”는 대목이 있던데, 동반 탈당했던 사람들이 누굽니까.

“조유식하고 지난번에 자수한 박모 변호사, 이런 사람들입니다. 김경환 같은 경우도 내용적으로는 동반 탈당한 거나 마찬가지인데, 실제로 97년 11월쯤에 탈당식을 가질려고 했는데, 깔끔하게는 정리가 안됐죠. 그런데 내용적으로는 탈당한 거나 마찬가지예요.”

-그 뒤에 민혁당 중앙위원회를 개최해 해산 선언을 했는데 같은 중앙위원인 하영옥씨가 반대를 했다는 것인데, 그 뒤로 최정남 사건을 계기로 2년 동안 중국에 있으면서 과거의 동지들에 대해서 어떤 식으로 설득하고 일을 진행시켰어요?

“중국에 있으면서 특별히 할 수 있는 건 별로 없었죠. 그런데 공식적으로 민혁당 해산 선언을 한 건 97년이지만 저 같은 경우는 그 이전부터 생각이 바뀌어 있었고, 93~94년부터는 다른 사람들한테도 영향을 주었기 때문에 이미 97년도에는 제가 직접 만나는 사람들은 따로 설득할 필요 없이 다 생각이 정리돼 있었어요. 하영옥이가 직접 관리하는 조직원들은 빼놓고.”

-북한의 수령론은 거대한 사기극이라든지, 김정일 정권 타도를 위한 좌우 대합작을 제안한다든지, 그동안 주창해온 명제들에 대한 소신은 지금도 변함이 없나요?

“예, 그렇습니다”

-그러나 북한으로부터의 신변 위협 같은 것도 있을지 모르는데 그런 위협과 장애를 어떻게 헤쳐 나갈 생각입니까.

“제 개인적으로 당분간은 활동에 제한이 있기 때문에 글을 쓰고 이론적인 토대를 다지는 작업에 집중할 생각입니다. 북한 민주화운동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부분은 북한 내부에서 북한 인민들이 변화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북한 내부에서의 운동과 그 방식에 대해 얘기할 수는 없는 것이고, 우선 남한에서 북한 인권과 관련된 국제 여론을 조성한다든지, 남한 내부의 여론을 조성한다든지 하는 일도 제가 볼 때는 대단히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탈북자를 보호하고 지원하는 일도 인권 보호라는 차원에서 북한 민주화운동하고는 또 다른 측면에서 중요합니다. 이런 북한 문제에 대한 남한 내부 여론의 확산이 지금 당장은 제가 생각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91년 잠수정을 타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있었습니까? 입북하라는 지시를 받고 고민을 많이 했을 것 같은데요.

“특별한 계기는 없었어요. 제가 북한 사회에 대해서 오래 전부터 보고 싶었고, 북한에 가서 주체사상 연구하는 학자들하고 토론해보고 싶고 그래서 간 것입니다.”

-북한 가서 오히려 북한 사회에 대한 실망이 컸는데 그렇지 않고 주체 사상에 대해서 연구할 것이 많다는 확신이 섰다면 머물 수도 있었습니까?

“그건 저는 상상도 할 수 없습니다.”

 


김일성의 첫인상과 면담 내용

 

 

-91년에 방북해 김일성 주석을 만났을 때 뭐라고 말했는지, 면담록을 입수해서 보니 면담 기록이 조금 밖에 안되던데….

“이미 오래된 얘기고 특별히 기억을 오래 간직해야 하거나 남을 만한 건 없었고…. 어쨌든 제 기억에 의존해서만 나온 겁니다.

-첫인상이 어땠습니까.

“뭐 그전에 기록영화라든가 그런 것에서 본 인상 그대로죠. 상당히 화통하고 포용력이 있고 친근감이 느껴지는 그런 인상이었어요. 저한테도 매우 정중하게 대해주던데요.”

-호칭은 뭐라고 했어요?

“김영환씨나 김영환 선생, 이런 표현은 안쓰고 그냥 ‘선생’이라고 불렀어요.”

-선생이 쓴 책을 잘 봤다, 이런 식으로 했다는 거죠? 참 그때 김일성이 “무엇보다도 사상이 중요하다”면서 “남조선 인민들을 주체사상으로 무장시키면 남조선 혁명은 이룩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했는데 그때 인원이 1000명이었어요, 1000만명이었어요? 기록을 보니 한 군데는 1000명이라고 돼있고 다른 한 군데는 1000만명이라고 돼 있던데.

“1000만명이었어요. 그래서 저도 이건 참 황당한 얘기다 싶고, 1000만명을 주체사상으로 무장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이런 얘기를 할까 말까 그러다가 분위기가 아니다 싶어 그만 두었습니다.”

-전혀 의견을 제시하지 않았어요?

“그런 부분에 대해서 특별한 전략을 구체적으로 논의하는 자리였으면 의견을 발표하고 그랬을텐데, 포괄적인 얘기를 하는 자리인데다 그게 전략으로 결집되는 것도 아니어서, 그냥 듣고 참고만 하고 따르지 않아도 되는 문제이기 때문에 제 의견을 밝히질 않았어요. 또 김일성은 괜찮더라도 주위사람들은 반론을 하는데 신경을 쓸 것 같고….

 


“여러분이 잠수정 타고 오면
김정일 동지는 한숨도 못잔다”

 

 

-면담하기 전에 어떤 지침을 주던가요? 이를테면 담화중에는 듣기만 하라든지.

“그런 것은 없었습니다. 제가 지적한 부분은, 김일성이 전에 쓴 글에도 보면 ‘남조선의 지하당은 혁명의 전략적 참모부’라는 대목이 있는데, 그걸 지적하며 실제적인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해 달라는 얘기를 했더니 김일성도 적극적으로 찬동을 하면서 옆에 있는 사회문화부장한테 남조선 혁명과 관련해서는 선생한테 배워야 한다는 얘기를 했었죠.”

-그때 부장만 배석했습니까.

“부장은 바로 옆에 배석을 했고, 과장은 뒷자리에 있었죠.”

-입북했을 때 김정일은 만나지 않았는데 김일성 주석이 김정일에 대한 얘기는 하던가요?

“김일성이 김정일 얘기를 많이 했죠. 지금은 김정일 동지가 다 일을 맡아서 한다, 이런 식으로 말했죠. 물론 자료나 방송을 통해 다 알고 있던 것이지만. 김일성은 김정일이에 대해 ‘김정일 동지’라고 표현하면서 ‘김정일 동지는 여러분에 대한 관심이 크다’는 것을 강조했어요. 예를 들어 ‘여러분이 잠수정을 타고 오면 그날 밤에 김정일 동지는 한숨도 못잔다’고 했습니다.

-이번에 정주영 회장이 김정일을 만나고 왔잖아요. 그런데 대화록을 보니까, 김정일이 남자 농구팀을 3년간 직접 지도해 농구가 세다고 그러고, 김용순 아태위원장은 미국 NBA와 겨뤄볼 생각이라고 장단을 맞추데요. 그 말 들으니 ‘지도자 동지’는 낮에는 농구 지도하고 현지 지도하랴, 밤에는 남한 운동권 학생 잠수정 타고 오면 잠 못자랴, 참 바쁘겠네요.

“하하하, 그렇네요.”

-전향한 남한 주사파의 대부이자 주체사상 이론가로서 북한의 주체사상과 북한 문제를 보는 시각을 좀 정리해주시죠.

“북한의 주체사상은 쉽게 말해 황장엽씨가 만든 주체 철학에다가 민족주의와 마르크스 레닌주의 사상이론, 수령론 등을 합쳐 만든 겁니다. 그런데 주체 철학으로 놓고 보자면 그것이 사회이론 차원에서 특별히 연구된 게 없고, 마르크스 레닌주의 이론을 따다가 그대로 결부시켜 놓은 거죠. 실제로 김일성은 주체사상이라는 말은 쓰지만, 제가 만나서 얘기해본 바에 의하면, 주체사상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이 없고 잘 모른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주체사상이라는 용어만 꺼냈지 실제로 김일성이 하는 얘기에는 주체사상의 내용이 녹아있는 느낌을 주는 것은 전혀 없었어요.

그래서 김일성은 정통 마르크스 레닌주의 사상에 깊이 빠져서 거기서 헤어나지 못하는 스타일의 지도자였고, 거기에 영합하다 보니까 철학은 주체사상인데 실천에 옮길 수 있는 이론의 측면에서는 마르크스 레닌주의죠. 이에 비해 황장엽씨 같은 경우는, 주체사상의 이론대로 하면 프롤레타리아독재 부분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입장을 가질 수밖에 없는데, 오히려 북한에서 김일성 스스로가 프롤레타리아독재를 옹호하고 개인독재를 활용하는 입장이었죠.

 


“국정원과의 약속은 밝히기 곤란”

 

 

-수사결과 최종적으로 공소보류 결정이 났습니다만, 김영환씨의 범죄사실을 과거 기준으로 보면, 밀입북해 김일성 주석을 만나고 4억원에 이르는 공작금을 받는 등 그야말로 ‘거물 간첩’인데. 수사기관의 그런 결정 자체가 이례적인 사건 아닐까요? 왜 그런 결정을 했다고 보십니까.

“그런 결정이 나온 배경은, 첫째로는 현 정부가 과거하고는 달리 (전향한 보안사범들을) 포용하고, 국가보안법과 관련해서도 보다 유연하게 법을 적용하는 그런 정책적 변화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두번째로는 제가 수사기관에 구속되기 상당히 오래 전부터 전향을 했고, 또 스스로 전향했을 뿐만 아니라 직간접적으로 저와 관련된 많은 사람들을 함께 전향하도록 영향력을 행사한 것도 그 배경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세번째는 제가 수배상태에 있었던 것도 아닌데 외국(중국)에서 귀국해서까지 자수를 하고, 그런 것을 종합적으로 참작해서 그렇게 되었다고 봅니다.”

-그런데 왜 ‘말’지 9월호 인터뷰에서는 그와 다른 주장을 했습니까? (김영환씨는 국정원의 사상 전향 심사를 받는 동안 월간 ‘말’지를 찾아가 국정원이 실적주의에 사로잡혀 자신을 정점으로 한 대규모 간첩단사건을 조작하려 한다는 취지의 주장을 했다).

“그 당시에 (이번 사건에 대한) 국정원의 입장이나 방침이 뭐였는지는 정확하지 않았지만, 제가 볼 때는 그 당시 국정원의 입장은 누가 전향했고 안했고를 불문하고 의심이 많이 가는 사람들과 조직의 중요한 위치에 있던 사람들은 일단 구속해서 조사하려는 취지였던 것 같았어요. 그런데 그건 제가 처음 조사받을 때 진술서를 작성하면서 (국정원 관계자들이) 언급한 내용하고는 좀 달랐고, 그러한 방식으로 수사하는 것은 올바르지 않다고 보았습니다.

그리고 일단 약속이 지켜지지 않은 부분에 대해서 화가 났고, 물론 어떻게 보면 제가 왈가 왈부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과거에 활동하다가 확실하게 전향을 해서 완전히 다른 방향(진영)에서 활동하는 사람들까지 사법처리하려는 이런 기준이 과연 적절하냐 하는 데 많은 의문을 품었어요. 수사기관의 그런 부분에 대한 반발심 때문에 그랬던 것입니다.”

-결국 국정원이 일종의 실적주의에 사로잡혀 수사 또는 사법처리의 기준이 애초에 약속했던 방향으로 가지 않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에 그랬다는 겁니까?

“예, 그랬습니다.”

-그렇다면 국정원에서 당초 약속했던 내용이 무엇인지요? 또 수사 과정에서 협조를 하면 어떤 방식으로 이 사건을 처리하겠다든지, 그런 걸 구체적으로 얘기를 했나요?

“그건 제가 구체적으로 밝힐 수 있는 사안이 아닙니다. 국정원 수사 과정이나 그 내용의 구체적인 부분은 제가 밝히기 곤란한 대목이 있습니다. 하여튼 약속이 있었지만 구체적으로 무슨 약속을 했는지는 밝힐 수 없습니다.”

 


정형근 의원의 위장전향 주장

 

 

-공소보류 결정 자체가 이례적인 사건이기 때문에 과거에 함께 운동을 했던 사람들 중에는, 그것이 국정원과의 협조 없이는 어려운 결정이고, 그렇기 때문에 국정원측과 ‘모종의 거래’를 했다는 의혹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의혹을 해소하는 차원에서 그 부분을 명확히 밝혀주면 좋겠는데….

“(국정원이) 공소보류 약속을 처음부터 했느냐, 그런 겁니까? 그런 것은 처음부터 없었어요. 그리고 처음에는 저에 대해서 사법처리할 거라는 생각은 전혀 안했어요. 저뿐만 아니라 저하고의 관련자들에 대해서도 사법처리를 할 거라는 생각은 전혀 못했습니다.”

-그런데 한나라당 정형근 의원 같은 사람은, ‘신동아’ 10월호 인터뷰에서도 그런 주장을 했고, 지금 현재 국정감사 과정에서도 그런 주장을 하고 있는데, 김영환씨가 전향하지 않았다는 것이거든요. 그 의 말에 따르면, 전향을 안했다면 결국 ‘위장간첩’이라는 얘긴데, 이런 주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요?

“그런 얘기는 저도 들었어요. 그런데 그런 얘기가 왜 나오는지 모르겠어요. 왜냐 하면 제가 위장전향을 할 이유가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저로서는 어떻게 보면 이른바 주사파 지도자로서 활동하는 게 개인적으로 유리하지, 위장전향을 한다면 득될 건 눈꼽만큼도 없고 잃을 건 굉장히 많거든요. 주사파에서의 신망과 영향력도 모두 잃어버리는 겁니다. 저 같은 경우, 주사파 지도자로서 활동하면서 법에 걸릴 행동만 안하면 구속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더구나 제가 외국에서 주사파 지도자로 행세하고 활동한다고 해서 어떻게 되는 것도 아닙니다. 위장전향한다고 해서 얻을 거라고는 전혀 없다는 겁니다.

그 다음에 남파간첩 원진우의 수첩에서 제 중국 거처 주소가 나온 문제인데요. 과거에 그쪽(북한) 사람들이 제가 접촉할 수 있는 중국내 비상선(非常線)까지 가르쳐주었기 때문에 전화 한 통화면 그 사람들과 통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중국에서 2년 체류하는 동안 그쪽 사람들에게 연락을 안했기 때문에 남한까지 내려와서 내 연락처를 알아낸 것인데, 이걸 보더라도 제가 중국에 있는 동안 북쪽과 연락을 안하고 있었다는 반증이 되는 거죠.

또 저하고 관련된 사람들의 진술이, 저한테 우호적인 피의자건 적대적인 피의자건 다 일치합니다. 예를 들어 제가 97년 전향(노동당 탈당식 및 해산 선언) 과정에서 했던 얘기들이 그 사람들 진술서에 구체적으로 나와 있는데, 거기에 보면 저는 잊고 있었던 구체적 발언까지 들어 있거든요.

더구나 북한 전문가들 누구나 다 얘기하는 것처럼, 위장전향을 하건 뭘 하건 북한체제나 주체사상을 비판할 수는 있어도 김일성·김정일을 직접 비판할 수는 없거든요. 그 누구건 절대 권력자인 김일성·김정일을 비판하는 것은 북한체제에서 절대 용납이 안됩니다. 북한체제에서는 설령 위장간첩이라 하더라도 체제나 노동당을 비판하는 것은 좋은데, 김일성· 김정일을 직접 비판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 대북 전문가들의 견해입니다.”

 


귀국결정 배경

 

 

-귀국결정을 한 배경이 궁금합니다 과거 친북 행적이라든가 이런 부분들에 대해서 명쾌하게 진술을 하되, 조직 관련 부분에 대해선 담판을 짓겠다든가 하는 식으로 내심의 결정을 했을 것 아니에요, (국정원에서) 처음 조사받는 것도 아닌데.

“담판을 짓겠다기보다도 일단 제가 진심을 얘기하면 그런 부분에 대해 얘기가 충분히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했죠. 일부는 이미 저와 함께 북한 민주화운동을 추진하고 있었고, 그래서 사상을 전향해 다른 방향에서 활동하고 있는 사람을 처벌하지는 않을 것 같다는 생각도 나름대로 했었죠.

그러나 21세기를 앞둔 99년의 상황에서도 여전히 친북적인 활동을 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과거보다 훨씬 더 비판적인 입장이 돼 있었고, 과연 우리가 그런 부분까지 절대적으로 보호해줘야 할 의무가 있느냐 하는 회의를 많이 느끼고 있었습니다. 물론 과거에 같이 활동을 하던 사람이지만.

북한 민중이 그처럼 고통받고 있는 조건에서 여전히 친북활동을 하고 있는 것은 김정일 정권의 범죄 행위에 대한 방조라고 보고 꾸준히 지적을 했는데도 그런 활동을 하고 있는 사람들까지 보호해주기 위해서 과연 제가 국내에 안들어올 필요까지 있겠느냐 하는 지적도 우리 내부에서 있었습니다. 그런 판단에서 귀국하기로 결정한 겁니다.”

-국정원 수사를 처음 받는다면 모르는데 지난 86년도에 안기부에서 상당한 고문까지 당하는 조사를 받았는데, 본인이 염려한 그런 부분들(과거 조직과 친북 행적)이 과연 쉽게 결말이 날 거라고 판단했다는 건 너무 순진한 것 아닙니까.

“시대 상황이 그 사이에 많이 변화했으니까요.”

 


상상을 초월하는 86년 고문이
‘강철’을 단련시켰다

 

 

-반성문을 쓰게 된 배경은 강요에 의한 겁니까, 자발성에 의한 겁니까? 아니면 자의반 타의반으로 봐야 하는지.

“자발적이었다고 봐야죠. 구속 수사를 받는 상황에 있었기 때문에 반성문의 형식은 강제성을 띠고 있는 것이지만 그 내용은 기본적으로 자발성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그 형식이 어쨌든 기본적으로 내용이 자발적이었다면 자발적인 것이라고 봐야죠.”

-구속 초기에 본인도 가족이나 변호인들에게 가혹행위를 호소했고 함께 구속된 사람들 가운데 일부도 그런 주장을 했었는데, 어땠습니까?

“하하하. 가혹행위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지금 상황에서 얘기하는 것은 좀 그렇네요.”

-그러면 예전에도 안기부 수사를 받았으니까 그때와 비교하면 어떻습니까?

“아, 옛날하고는 비교가 안돼죠. 사실 전에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고문을 많이 받았는데, 물고문한다든지 그런 것은 없어졌습니다.”

-86년 구국학생연맹 사건으로 안기부에서 조사받을 때 주사파의 행동 지침서인 ‘강철 서신’을 과연 누가 썼느냐 이런 부분들이 수사과정에서 상당히 쟁점이 됐었고, 안기부의 최종 판단은 ‘강철 시리즈’ 문건을 김영환씨가 쓴 게 아니라는 거였죠?

“예, 제가 안썼다는 거였죠.”

-결국 당시 안기부가 수사를 잘못한 거네요? 고문까지 했으면서도 필자가 누구인지조차 알아내지 못했으니까.

“하하하. 그렇죠. 수사를 잘못한 거죠. 제가 쓴 것이라고 말했는데도 안믿었으니까.”

김영환씨는 86년 안기부에 구속되었을 때 인간으로서 견디기 힘든 혹독한 고문을 겪었다. 고문을 겪게 된 수사쟁점 중의 하나는 ‘강철 시리즈’를 과연 누가 쓴 것인 불라는 거였다. 김씨는 본인이 썼다고 사실대로 얘기했지만 수사관들은 이를 믿지 않았다. 그는 사실대로 말했기 때문에 오히려 고문을 당해야 하는 역설적인 상황에 처해 있었다. 당시 면밀히 문건을 분석했던 대공 수사관 및 분석관들이 그 내용이나 솜씨로 볼 때 도무지 대학생이 쓴 것은 아니라는 견해를 피력했기 때문이다.

또 다른 역설은 이때 당한 ‘억울한 고문’을 겪은 상당수 운동권 학생들이 출감후 오히려 단순한 ‘친북’에서 실제적인 ‘연북’으로 완전히 돌아섰다는 것이다. 86~87년 사이에 구속되어 88년에 출감한 김영환씨와 그의 대학 동기 하영옥씨 그리고 후배 조유식씨 (전 ‘말’지 기자) 등이 다 그런 경우이다. 당시 대공수사기관으로부터 당한 야만적인 폭력과 고문 앞에서 육신은 굴복했지만 정신만큼은 더 단련되었다는 것이 이들의 일치된 경험담이다. 그런 생리를 간파한 북한의 대남 공작기관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 수감된 전력이 있는 주사파 운동권 학생들을 상대로 이들의 대공 수사기관에 대한 증오심을 활용해 포섭 공작을 펼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실제로 남파간첩 윤택림(56·현 북한 대외연락부 5과장)은 김영환이 출감한 지 6개월 만인 89년 7월초에 김씨를 포섭해 노동당에 현지 입당시킨 후 그를 통해 하영옥과 조유식, 김경환(전 ‘말’지 기자) 등을 현지 입당시켰다. 이것은 북한 대남 공작기관만이 확인해 줄 수 있는 사안이지만, 86년초부터 남한에서 자생적으로 나온 ‘강철 시리즈’를 계기로 필자가 누구인지 궁금해하던 북한 당국이 86년말 구학련 사건을 계기로 ‘강철’이 김영환이라는 첩보를 입수해 그를 포섭 대상 1호로 ‘점찍은 것’이라는 추론이 가능하다.

출감후 남파간첩에 포섭된 김영환이 91년 밀입북해 김일성 주석을 만났을 때 김주석이 “선생의 글을 다 읽었다”며 ‘강철 시리즈’를 높이 평가한 것도 그와 같은 추론을 뒷받침한다. 바로 그런 점에서 ‘강철’을 단련시킨 것은 ‘김일성의 주체사상’이 아니라 당시 정형근 단장이 수사를 지휘했던 ‘안기부 수사관들의 고문’이었던 셈이다.

-이번 사건의 경우 구속되기 전에는 R호텔에서 조사(사상 전향 심사)를 받았잖아요. 그런데 이번 사건을 맡은 수사단장 말로는 “인간적으로 참 잘 대해줬는데 괘씸하게도 ‘말’지를 찾아가 ‘국정원이 간첩사건 조작을 기도하고 있다’는 취지의 인터뷰를 함으로써 수사를 방해했다”고 하던데. 국정원 판단으로는 김영환씨가 그런 주장을 함으로써 연계된 조직원들이 도피를 한다든가, 다른 대비를 할 수 있도록 메시지를 준 것으로 볼 수 있거든요. 그런 수사 방해 의도를 갖고 ‘말’지와 인터뷰한 것입니까?

“그런 의도는 없었습니다. 제가 수사를 방해하려고 맘 먹었다면 그런 식으로 공개적으로 안하죠, 비공개적으로 하지. 또그때는 이미 이 사건의 전모가 거의 다 밝혀진 상황이었거든요.”

 


“인터뷰하러 ‘말’지 찾아간 것 아니다”

 

 

-사건에 관련된 수많은 사람들한테 일일이 다 알릴 수는 없으니까 공개 매체 인터뷰를 통해서 한 것 아니에요?

“관련된 사람이 많다고 할 수는 있지만, 실제로 저는 제가 아는 사람들에 관해서만 진술할 수밖에 없었고 국정원도 제가 진술한 사람에 관해서만 알 수 있는 것이거든요. 그런데 그 사람들은 이미 전향한 것으로 판명됐고 이번에 새롭게 나온 사람들 같은 경우는 다른 사람의 진술이나 수사자료라든가 하는 것에서 나온 거라고 봐요. 제가 알고 있던 사람 수는 얼마 안돼요.”

-그렇다면 ‘말’지를 찾아가서 국정원의 강압적인 진술 강요라든가, 약속 위반이라든가, 무리한 실적주의라든가 하는 주장을 공표하게 한 진짜 의도는 무엇입니까?

“그 당시에는 국정원이 사상 전향 여부와 상관없이 과거에 활동(민혁당)했던 사람들을 일단 일괄적으로 다 잡아들여서 구속하고 사법처리하는 식의 수사 방향에 대해서 강력하게 불만을 갖고 있었고, 따라서 거기에 제동을 걸어야 되겠다, 그러한 판단에서 하게 된 거죠.”

-이번 사건은 민혁당과 남파간첩의 두 사건으로 나눌 수 있는데, 결말은 남파간첩 원진우와 연결된 세 사람만 구속됐을 뿐이고, 민혁당과 관련된 사람들은 아무도 구속되지 않았잖아요.

“그러니까 그 시점에서 구속 대상자는 17명이다 이랬는데, 국정원의 입장이 애초부터 과연 그랬느냐 하는 것에 대해서는 판단하기 어려웠고, 아마 그 과정에서 국정원도 처음부터 이런 식으로 결정을 내리고 시작한 것은 아닌 것 같아요.

-그렇지만 국정원으로서는 당연히 관련자들을 포함해서 모든 것을 수사해봐야 아는 것 아니예요? 어떤 범위를 정해 놓고 수사하는 것이 아니라 일단 수사를 한 다음에 정상을 참작해 사법처리 범위를 정하는 것이 수사의 정도 아닌가요?

“물론 수사를 해봐야 아는 것인데, 사람들의 성향(전향 여부)이나 현재의 활동을 구분하지 않고서, 과거에 활동을 정리한 사람이건 지금 활동(친북)하는 사람이건 구분하지 않고 막 구속을 해서 수사를 하면 부작용이 많이 있다고 보거든요. 수사를 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사실이 밝혀지면 당연히 수사를 해야겠지만 일단 그 기준을 심도 있게 구분해 수사해야 된다는 것이죠. 어쨌든 그 과정에서 국정원하고 제가 서로를 신뢰하지 못한 것은 안타깝게 생각하는데, 그 과정이 매끄럽게 되지는 않았지만 결과적으로는 잘 되었다고 봅니다.”

-이번 사건 이후 자수자는 몇명이나 되나요?

“10명 정도 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황장엽 비서의 격려사

 

 

-김영환씨는 8월16일 밤 국정원을 비난하는 ‘말’지 인터뷰를 한 뒤 곧바로 출국하지 않고 18일날 출국하려고 했죠? 국정원측이 ‘말’지와 인터뷰한 것도 다 체크를 하고 했을텐데 공항을 통해서 출국하려고 했던 것 자체가 어떻게 보면 체포될 것을 예상하고 한 행동이거나, 아니면 시쳇말로 국정원하고 ‘짜고 친 것’ 아니냐고 보는 그런 시각도 있습니다만.

“하하하. 그것은 제 성격을 잘 몰라서 하는 얘긴데….”

-하지만 국정원과 사건의 매듭을 지으려면 상당 부분 수사에 협조해야 되는 것이 사실이고, 국정원에 협조했다는 사실이 심리적 부담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이런 부담을 덜기 위해서 체포될줄 뻔히 알면서도 출국을 시도할 수 있는 것 아닐까요?

“운동권에서 과거 활동을 고수하는 사람들은 저에 대해 전향했다고 이미 좋지 않게 보기 때문에 그런 부분에 대해서 부담이 있거나 그렇지는 않습니다.”

-국정원 구속기간 중 황장엽씨와 면담을 했는데 주로 무슨 얘기를 했습니까.

“짧은 만남이었고 주로 저희를 격려하는 말을 했어요. 북한과 연결되어 활동했던 시기를 과거라고 하고 전향한 이후를 현재라고 하면, 과거의 활동이 우리의 잘못이라기보다는 순수한 학생들의 열정을 이용하려고 한 김정일 정권의 잘못이 크다고 했죠. 그리고 현시점에서 김정일 정권에 반대하는 국민적인 힘을 모아야 한다면서 제가 그동안 발표한 글과 그런 명제에 대해 높이 평가해 주었어요.”


-반성문에 보니까 북한 민주화운동을 하면서 황장엽 선생과 함께 인류의 미래를 열어주고 현 사회를 정확히 설명해 줄 수 있는 사상이론을 연구하겠다고 했는데, 너무 거창하다는 느낌이 들거든요.


“사실 거창한데, 구체적인 계획이 안잡혀 있는 얘기가 추상적으로 나오다 보면 거창한 느낌을 갖게 되죠.”

-반성문에서도 여전히 자기확신이 강하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런 성격이 김영환씨의 사상과 운동방식을 오류로 이끌었던 것 아닙니까?

“국정원에서 문제 삼고 있는 게 89년 이후의 활동인데, 실제로는 86~87년도 활동이 자기 확신에 의한 것이었죠. 89년 이후 과정들은 북에 가서 영향을 받기 이전부터 이미 저는 사상이 많이 바뀌기 시작했고, 89년 이후에는 북한 체제에 대한 자기 확신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어요. 다만 실천에서 우유부단한 측면은 있었어요.

한때 북한 사회에 모든 희망을 두고 있었고 북에 연계되어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쉽게 결단을 내리지 못했어요. 그러나 실제로 북한을 방문하기 이전부터 북한의 사회주의에 비판적이었고, 89년말에 동유럽 체제가 붕괴되면서 본격적인 비판 입장이 됐고, 90년경에는 부정적으로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북한식 사회주의 체제를 동경을 한다든지 실제로 북한 상황을 긍정한 건 아니었죠.”

-그러면 91년 북한을 방문했을 때는 그런 본인의 생각이나 판단을 현지 방문을 통해 확인해보자, 이런 목적도 있었겠네요?

“그렇죠. 그런 것도 있었고 과거 사회주의 체제를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이 주체사상으로부터 나올 수 있는 것 아니냐는 생각을 많이 했죠. 마르크스 레닌주의를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이론을 만들어내야 되겠다라는 생각도 들고. 그런데 북한을 방문해 보니까, 김일성은 주체사상에 대해 잘 모르고, 주체사상 전문가라고 하는 철학박사들과 토론을 했지만 자유롭게 연구할 수 있는 분위기는 아니었습니다. 물론 그 사람들 나름대로 전문성도 있고 지식도 많을텐데, 뭔가 자유롭게 얘기하지 못하는 거에요.”

 


수사형평성의 문제

 

 

-민혁당 해산 선언을 했을 때 하영옥씨가 반대하고 조직을 접수하려 했는데, 그 과정에서 김영환씨의 그런 행동이 하영옥씨를 통해 북한에 보고되지 않았습니까? 또 사상 전향을 하고 민혁당을 해체하려는 데 대한 북한의 직간접 압력은 없었나요?

“하영옥이는 그때 북과 연결할 수 있는 통로가 없었죠. 북하고 직접 연결할 수 있는 루트가 있는 것이 아니고 저를 통해서만 하는 거였죠.”

-어떻게 보면 수사 형평성의 문제가 제기될 수 있는 것 아니에요? 수사기록을 보면 하영옥 심재춘 두 사람은 남파간첩과 접촉을 했고 그 간첩이 탈출하는 데 도움을 준 그런 부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김영환씨도 97년까지는 조유식을 통해 북한하고 교신을 했죠. 거기에는 그것이 대북 보고였는지, 북한의 일방적인 지시였는지 등을 판단하는 문제가 남습니다. 또 내심은 안그랬지만 조직을 보호하고 조직원을 설득하는 과정에서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고, 그런 과정에서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었는지도 모르지만 어쨌건 97년까지는 교신을 했단 말이에요. 그렇다면 하영옥 심재춘이 포섭된 98년과 불과 1년 차이밖에 나지 않거든요. 그런데 하영옥·심재춘 두 사람은 구속되고 오히려 주범인 김영환씨는 석방되는 그런 형평성의 문제가 있단 말이에요.

“시간의 차이가 문제가 아니죠. 2년 차이인데 2년 차이가 아니라 1주일이든 하루 차이든, 그게 시간적으로 역전됐다고 하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사람들이 전향을 하고 그랬다면 98년도에 접촉을 했다 하더라도 선처될 수 있는 여지가 있죠. 그런데 그게 전혀 아니고 지금도 여전히 전향을 안하고 있으니까 문제죠. 국가보안법 같은 경우에는, 실제로 형벌에는 여러가지 목적이 있잖아요? 사회적 위험 요소를 예방하기 위한 경우도 있고, 어떤 죄에 대해 처벌하는 경우도 있고, 어쨌든 국가보안법은 예방적인 법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일제시대 때, 해방 직후에도 그랬고 사상 전향이 확인되면 과감하게 봐주고 그랬죠. 빨치산 활동하고 무장활동 하던 사람이 전향하면 봐주고, 그 사람이 전향했느냐 안했느냐, 그 전향이라는 게 수사기관에 와서 말로 하는 전향이 아니라 확실하게 증거들이 드러나는 진짜 전향이 중요하죠. 우리 같은 경우는 우리 자신이 전향을 했을 뿐만 아니라 다 그만두고 홀로 있다든지 그런 것도 아니고, 우리가 전향을 하면서 우리가 영향을 줬던 대단히 많은 사람들, 학생들까지 따지면 최소 3천~5천명 정도 동시에 영향을 주면서 전향했기 때문에 그런 부분에 대한 공도 있고, 그런 것이 고려되었죠.

 


최소 3천~5천명 정도 동시에 영향

 

 

-반성문을 썼는데 사상전향 부분에 대해선 본인의 판단은 어떤 겁니까?

“그런데 전향서를 쓰라거나 이런 건 없잖아요. 어쨌든 저같은 경우는 이론가다 보니까 사상전향이라면 이쪽 편에 설 것인가 저쪽 편에 설 것인가 이런 문젠데, 저는 이론가다 보니까 이게 옳은가 저게 옳은가를 일일히 검토해보는, 예를 들어서 프롤레타리아 독재론은 잘못 됐지만 연방제는 옳다. 이런 식으로 볼 수 있고, 일일이 하나 하나 다 분석해서 옳고 그름을 판단해서 할수 있는 문제지 단순히 이쪽 편에 설 것이냐 저쪽 편에 설 것이냐 그런 문제가 아니죠.

-끝으로 본인이 하고 싶은 얘기가 있습니까?

“제 자신이 운동가로서 활동해 왔지만 기존의 어떤 사상을 고수하려는 사람이건 아니면 그에 대해서 비판적인 입장을 가진 사람이건 좀더 진지하고 깊이 있게 논의할 수 있는 분위기가 형성돼야 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간단하게는 탈북자 문제에서 그 규모가 과연 얼마인지 실상은 어떠한지 등을 규명해 들어가는 문제부터 시작해서 나아가서는 기존 사회주의 이론을 깊이 있게 논의하는 그런 노력이 전반적으로 부족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저는 92~93년부터 상당히 우회적이긴 했지만, 기존의 사회주의 이론에 대해서 비판적인 글을 많이 쓰곤 했어요. 그런데 읽는 사람이 한정돼 있고, 그런 글을 읽는 사람도 깊이 있게 생각을 안하고, 그런 것이 상당히 안타깝더라고요. 그래서 운동을 하는 사람도 관성대로 운동을 하고 깊이 있게 고민하지는 않고 단순히 개인적인 문제로만 치부해버리고, 그러다 보니까 악순환이 계속되고 근본적인 문제의 해결이 안되지 않느냐, 그런 생각이 듭니다.

-그동안 자신과 관련된 언론 보도는 거의 다 보았을텐데, 불만스런 내용은 없었나요?

“큰 방향에서 뭐가 잘못됐다고 얘기하기는 어렵지만, 이를테면 언론 보도는 제가 주사파의 대부로 불리고 있다가 사상 전향을 해서 지금 관심을 끈다, 이런 식으로 부각해서 하는데. 물론 그런 것도 나름대로 필요할지는 모르지만, 과연 제가 어떤 고민을 주로 해왔고 지금 주장하고 있는 북한 민주화운동이라든가 황장엽씨하고 같이 주체사상을 연구하는 문제라든가 이런 것들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논의를 했으면 합니다.”

-단기적이건 장기적이건 김영환씨가 하려고 하는 사안의 성격상 국정원과의 긴밀한 협조가 필요할텐데, 혹시 황장엽 비서가 이사장으로 있는 통일정책연구소 같은 데서 함께 일할 생각은 없습니까.

“어차피 저는 상당기간 어디에 붙박이로 출퇴근할 수는 없습니다.”

-국정원 산하 연구소도 불안합니까?

“산하 연구소지만 국정원 바깥에 있잖아요?”

 


‘세상이 바뀌면 시대정신도 바뀐다’

 

 

-신변 위협이 그 정도로 심각합니까?

“그런 것은 아니에요. 어디 돌아다니는 것은 오히려 상관이 없어요. 그렇지만 어디에 정기적으로 나가거나 거처가 알려진다든지 그런 것은 스스로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제 스스로 오랜 기간에 걸쳐 정보기관 추적을 늘 의식하고, 피하고, 다른 사람도 관리하고 그랬기 때문에 그런 것에 대해서는 전문가라고 할 수 있거든요.”

-얼마 있으면 김영환씨 책이 나온다면서요? 핵심 내용을 밝히면 어떤 겁니까?

“생산력과 생산관계 이론에 기초한 과거의 전반적인 이론과 사상을 바꾸고 지금 변화된 시점에서 인류와 한국 사회에서 절실히 필요한 방향을 모색하는 그런 내용입니다.”

‘세상이 바뀌면 시대정신도 바뀌어야 한다’. 그가 오는 11월초에 출간하는 새 책의 제목 이자 어쩌면 그의 ‘전향 의 변’인 셈이다. 사상 이론가들은 역시 거대 담론에 매력을 느 끼는 모양이다.

 

 

 

 

 

 

 

[신동아 발언대]전향한 주사파 대부 김영환 ]

 

“북한을 공격적으로 포용하라”

 

 

80년대 ‘강철’이란 필명으로 주사파학생운동의 이론적 대부로 활동하다가 91녀 밀입북해 김일성 주석을 만났던 김영환(37). 북한과 연결된 민혁당사건으로 지난해 국정원의 조사를 받았으나 반성문을 쓰고 사상전향을 하고 나온 그는 오늘의 급변한 남북관계를 어떻게 보고 있을까.

 


   

 

 “지 난 6월13일 대한민국의 김대중 대통령은 평양 순안공항에 도착하여 공항에 마중 나와 있던 조선노동당 총비서이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지도자인 김정일과 반갑고 힘차게 손을 부여잡았다. 역사상 최초로 남북 정상의 감격적인 만남이 이루어진 것이다. 곧 이어 이루어진 의장대 사열에서 조선인민군 명예위병대장 차민헌 대좌는 대한민국 국군의 최고통수권자인 김대중 대통령 앞에서“조선인민군 육해공군 명예위병대는 경애하는 최고사령관 동지와 함께 김대중 대통령을 영접하기 위해 정렬하였습니다”라고 소리 높여 외쳤다.

대한민국 국군과 조선인민군은 50년 전에 서로 수백만 명을 죽인 당사자인데 바로 그 책임자들이 반갑게 서로의 손을 부여잡고 화해의 악수를 하고 조선인민군의 사열까지 받았으니 이 어찌 감격스러운 일이 아니랴.

그러나 여기서 나는 감격스러워 할 수만은 없었다. 김대중대통령의 손을 부여잡고 있는 이는 지난 몇 년 동안 수백만 명의 북한 동포들을 굶어죽게 하고 지금 정치범수용소를 비롯하여 북한 전역에서 자유를 억압하고 있는 바로 그 최고책임자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그 장면을 텔레비전으로 보고 있으면서 매초마다 반가움과 감격, 분노와 증오의 감정이 교차했다.

일견 모순되어 보이는 이러한 감정은 ‘남북문제’와 ‘북한문제’라는 서로 밀접히 연관되어 있으면서도 그 차원과 성격이 완전히 다른 두 가지 문제가 겹쳐서 생겨난 것이다. ‘남북문제’란 남한과 북한이 화해하고 평화롭게 지내며 서로 교류하고 협력하고 지원하고 더 나아가 통일하는 문제이고 ‘북한문제’란 북한이 정치적, 경제적으로 발전하는 것,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 경제적으로는 굶주림과 궁핍에서 벗어나 유복한 삶을 누리게 되고 정치적으로는 보다 많은 권리를 향유하는 문제다. 좀 더 직설적으로 말해 지금의 북한이 처한 정치적 경제적 상황에 결정적 책임이 있는 김정일정권 대신 민주적인 정부를 수립하여 그 새로운 정부 주도로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발전을 도모하는 것이다.

‘남북문제’는 남북분단과 6·25전쟁, 냉전, 대결정책 등으로 야기된 모든 문제를 평화적이고 상호존중적이고 협력적인 관점과 방법으로 해결해 나가자는 것이다. 남북분단이나 6·25전쟁이나 과거의 대결정책 등에 관해 서로가 서로에 대해 비판하고 싶은 부분들이 많을 것이지만 서로의 주장만 내세우다 보면 화해와 협력과 통일의 길로 가기가 어려워진다. 따라서 남과 북의 정상이 만나 과거의 일은 과거의 일로 털어버리고 남북대결의 시대를 종식하고 화해와 협력의 새 시대를 열어나가고자 한 이번의 남북정상회담은 정당하고도 정확한 일이었다. ‘남북문제’만 있다면 뭐 그렇게 복잡할 것도 없다. 그러나 문제는 ‘북한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여전히 남는 ‘북한 민주화’문제


 
 

나는 ‘북한문제’를 해결할 책임이 꼭 대한민국 정부나 대한민국 대통령에게 있다는 것은 아니다. 있다고 해도 좋고 없다고 해도 좋다. 대한민국 헌법상으로는 북한 지역도 대한민국 정부가 책임져야 할 지역이니까 책임이 있다고 해도 좋고. 현실적으로 대한민국 정부는 남한 주민들을 대표하고 있고 남한 주민들에 의해 구성된 정부이기 때문에 북한 지역에 대해서는 책임이 없다고 해도 좋고 형식 논리를 떠나 도의적인 책임이 있다고 해도 좋다. 그 어떤 입장을 취하더라도 그에 관해 시비 걸 생각이 전혀 없다. 따라서 한국 정부가 ‘북한문제’의 해결과는 초연하여 남북간의 대결종식과 화해와 교류에 힘을 집중한다고 해서 이를 올바르지 않다고 몰아붙일 생각도 전혀 없다.

사실 한국 정부는 남북긴장완화와 화해 등에서는 주연의 하나로서 결정적인 구실을 해야 하지만 ‘북한문제’의 해결에서는 주연이 아니다. ‘북한문제’의 해결에서는 북한 인민이 주연이며 한국 정부는 조연도 제대로 하기가 쉽지 않다. 또 남북대결과 냉전이 북한 인민의 해방과 발전을 가로막는 족쇄 노릇을 해 온 측면이 있기 때문에 한국 정부가 남북대결을 종식시키고 화해와 평화와 교류의 시대를 연다면 그것 하나만으로도 중장기적으로 봤을 때는 북한 인민의 해방과 발전에 크게 기여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나는 이번 남북정상회담의 성과를 진심으로 높이 평가한다.

그러나 민간단체나 개인이 할 일은 정부의 역할과는 다르다. 어떤 민간단체나 개인은 정부가 할 일을 단순히 보조하거나 선도할 수도 있겠지만 또 정부가 할 수 없는 일들을 맡아서 하는 단체나 개인도 반드시 있어야 한다.

한국 정부가 ‘북한민주화’와 관련된 주장을 편다면 이는 화해와 교류와 협력의 길로 나아가는 데 어려움을 조성할 수도 있기 때문에 현 정세 속에서는 적절하지 않지만 민간단체나 개인은 정부와는 다르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북한민주화’를 주장할 수 있다고 본다. 그리고 ‘북한민주화’는 그 자체로도 매우 중요하다.

객관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남북문제’의 해결보다는 ‘북한문제’의 해결이 훨씬 중요하다. 남북관계에 있어서는 체제 대결도 이미 끝났고 군사력도 한미연합군이 인민군에 비해 상당한 우위에 있기 때문에 큰 문제가 아니다. 다만 좀 더 적극적인 관점에서 화해와 교류와 협력을 도모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북한문제’는 이보다 훨씬 절박하다. 경제가 최악의 상태를 벗어났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으며 인민에 대한 극단적인 억압과 인권유린이 공공연히 자행되고 있다. 모든 문제 중 가장 중요한 것이 ‘사람’의 문제이고 ‘사람’의 문제 중에서도 선차적인 것이 최소한의 경제적 조건과 최소한의 건강과 최소한의 인권이라도 보장하는 것인데 북한에서는 이것이 제대로 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사활적으로 중요한 것이다.

북한에서 김정일 주도의 개혁과 개방이 성공한다든지 등의 다른 발전경로를 생각하면서 ‘북한민주화’ 노선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는 적절한 주장이 아니라고 본다. 완전히 새로운 형태의 민주적 리더십을 만드는 노력이 북한 내부에서 진행되는 것은 북한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든 이로운 것이다. 70년대에 김대중, 김영삼, 재야, 학생 등이 완전히 새로운 질의 민주적 리더십을 건설하기 위해 노력하고 투쟁한 것은 그 어떤 경우의 수를 생각해보더라도 그 이후의 역사 발전에 도움이 됐지 그 반대는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박정희정권의 공(功)을 강조하든 아니면 과(過)를 강조하든 박정희를 영웅으로 보건 아니면 악마로 보건 바뀌지 않는다.

70년대에는 우리나라가 빠른 속도로 발전하고 있었고 현재의 북한과 비교해 훨씬 자유로웠지만 그래도 민주화운동이 필요했다면. 경제정책의 실패로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고 상상을 초월하는 억압 아래 있는 북한은 더 말해 무엇하랴?

어떤 사람은 우리가 북한 인권 문제를 자꾸 거론하거나 북한민주화 주장을 굽히지 않으면 ‘국론분열’ 현상이 나타날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앞에서도 말했듯이 우리는 우리 정부의 대북 정책 그 자체를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정부는 그 나름대로 취해야 할 태도가 있다. 예를 들어 일본의 어떤 정치인이 한일관계나 역사문제에 대해 적절치 않은 발언을 했을 때 이에 대응하는 정부의 태도와 민간단체의 태도는 다를 수밖에 없다. 정부는 국가 관계에 금이 가지 않도록 조심스러운 태도를 취하는 것이 정석이고 민간단체는 외교적인 측면을 고려하지 않을 수는 없지만 외교적인 측면보다는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분명하게 따지고 분명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태도를 취해야 한다. 이것은 국론분열이 아니라 일종의 역할분담과 같은 것이다.

한국 정부가 북한에 대해 대결적인 자세를 취하고 남북간에 긴장을 조성하는 일은 북한 정부의 자세를 더욱 경직되게 하고 북한의 문을 더 걸어닫게 만드는 결과를 만들기 때문에 적절하지 않지만 민간단체는 북한의 현실과 문제점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이를 사실대로 알릴 의무가 있다. ‘북한민주화’는 분명히 북한 인민이 주체가 되어서 해야 할 일이다. 국제적으로 아무리 난리를 친다고 해도 북한 인민이 나서지 않으면 실현될 수 없다. 그러나 다른 나라의 단체와 개인들도 ‘북한민주화’를 위해 해야 할 그에 맞는 구실과 의무가 있다. 특히 동족인 우리들이 해야 할 구실과 의무가 특별히 크다.

 

 

중국식 개혁·개방이 어려운 이유


 
 

북한민주화를 추구하면서도 북한의 앞날에 대해 어느 한 가지 가능성만 강조하는 것은 올바른 자세가 아니며 거기에는 여러 가지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중 하나가 최근에 관심의 초점이 되고 있는 ‘김정일정권 주도의 개혁과 개방의 길’이다. 그 가능성에 대해 지나치게 낙관하는 사람이 많은데 솔직히 말해 낙관하기는 대단히 어렵다.

사람들은 중국에서 이러한 정책이 성공한 것만 생각하고 78년 당시의 중국과 현재의 북한이 어떤 차이가 있는지에 대해서는 깊게 생각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사실 중국식 개방정책을 북한에 적용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은 매우 복잡하고 미묘한 문제다. 78년의 중국 상황과 현재의 북한 상황이 너무나 다르다는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개방을 추진하는 것이 개방을 추진하지 않는 것보다는 훨씬 낫기 때문에 사실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도 약간 망설여지는 측면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우선 상황에 대해 정확히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좀 장황하게 설명하기로 하자.

첫째, 78년의 중국은 새롭게 집권한 세력이 주도하고 있었지만 현재의 북한은 그렇지 못하다. 76년의 모택동 사망과 4인방 타도, 78년의 등소평의 당내 투쟁 승리와 실권 장악 및 노선의 대전환은 사실상 하나의 커다란 혁명이었다. 이러한 혁명적 분위기 속에서 새로운 세력이 중국을 주도했으나 북한은 그 반대다.

둘째, 등소평은 문화대혁명 시기의 잔혹한 행위들과 경제적 파탄에 책임이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 가장 큰 피해자의 한 사람이었으나 김정일은 지금까지의 북한의 정치적 억압과 경제적 파탄에 결정적 책임이 있는 사람이다. 당시의 등소평은 중국 실상과 과거의 잔혹한 일들이 알려지더라도 별타격을 받지 않고 오히려 정적들을 공격하고 정치적 입지를 굳히는데 이용할 수 있었는데 비해 북한의 김정일은 실상이 알려지면 알려질수록 정치적으로 궁지에 몰리게 될 가능성이 많다.

셋째, 78년 당시 중국에는 매우 강력하고 높은 권위를 가진 공산당이 있었지만 북한에는 이런 것이 없다. 78년 당시 중국에서 혁명적인 대전환이 가능했던 것도 강력한 공산당이 있었기 때문이다. 당이 어떤 결정을 내리든 이에 무조건 따르겠다는 자세를 갖고 있었기에 이러한 변화가 가능했던 것이다.

그러나 북한의 조선노동당은 오랜 기간에 걸쳐 1인독재의 도구로만 이용되어오다보니 껍데기만 남게 되었다. 북한에서 오래전부터 당이 무슨 내린 결정을 내리는가보다 김정일이 무슨 지시를 하는가가 훨씬 중요했다. 당이 내린 결정이라도 김정일의 새로운 지시에 반하는 것이면 즉각 수정했으며 만약 김정일의 지시에 어긋나는 당의 결정이 나오는 경우에는 설사 그것이 실수였다고 하더라도 그 결정에 직간접적인 책임이 있는 사람들은 ‘반혁명’의 죄로 처단되거나 까다로운 심사의 대상이 된다. 오랜 기간 이렇게 길들어 있다 보니 설사 김정일이 죽거나 제거된다 하더라도 조선노동당이 자기 중심을 확실히 잡지 못하고 누가 권력을 잡을지에 관심이 쏠릴 것이다.

 

 

확실한 개방, 전면적 시장경제 도입해야


 
 

개방이 되면 김정일의 권위에 손상이 가게 될 것이 분명한 조건에서 조선노동당이 확실히 자기 자리를 잡고 있어도 어려운 판에 이처럼 조선노동당의 입지가 불투명한 상황에서는 더욱 어려울 수밖에 없다.

넷째, 78년의 중국에서 등소평의 권위와 인기는 급속히 올라가고 있었는데 비해 북한에서는 최근 몇 년 동안 김정일의 권위가 급속히 떨어지고 있다. 그리고 김정일은 북한 사람들에게는 오랫동안 오직 숭배와 복종의 대상일 뿐이었기 때문에 인기 같은 것은 따질 수도 없다.

70년대말 80년대초의 등소평의 인기는 정말 대단했다. 78년 사상투쟁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등소평이 북경의 축구경기장에 모습을 드러낸 적이 있는데 이때 경기를 구경하고 있던 북경 시민들이 모두 자발적으로 일어나 열렬하게 박수를 쳤다. 이 박수치는 시민들의 편안하게 웃는 모습에서 이 사람들이 정말 등소평을 좋아하고 있구나 하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다섯째 중국이 개방을 시작한 78년과 지금은 국제정세가 크게 다르다. 78년 당시는 미국이 상당히 어려운 상태에 있었고 사회주의국가들이 (속으로는 상당히 많이 썩고 있었겠지만) 적어도 겉으로는 건재했으며 공산주의 이념도 큰 타격을 받지는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사회주의 진영은 완전히 붕괴되었으며 공산주의 이념은 엄청난 타격을 받아 거의 빈사상태에 있다. 사회주의를 자처하는 중국에서도 공산주의 이념을 갖고 있는 사람을 찾기는 정말 보물찾기보다도 더 힘든 상태가 되어버렸다. 이런 조건에서 개방을 시작하는 것은 78년에 비해 크게 더 힘들다는 것은 명약관화하다.

이런 차이들을 살펴보면 북한에서 개혁과 개방이 성공할 가능성이 거의 없어 보인다. 그러나 또 꼭 그렇지도 않다. 북한체제의 가장 큰 약점은 모든 권력과 권위가 김정일에게 집중되어 있다는 것인데 이것은 약점이자 장점이기도 해서 개혁과 개방의 성공 가능성을 높여주는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이런 것들을 종합해 볼 때 지금부터 확실한 자세로 개혁과 개방을 동요 없이 강력하게 추진해 나간다면 성공할 가능성이 30% 정도는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북한이 경제개발에 성공하려면 시늉뿐이 아니라 확실하게 개방을 해야 하며 전면적인 시장경제 체제를 도입해야 한다. 정치적으로는 점진적 변화를 추구한다 하더라도 경제부문에서는 초기부터 모든 영역에서 시장경제적인 요소를 과감하게 도입해야만 한다. 모든 부문에서 기업과 개인의 실리추구를 용인하고, 국유기업들에 의한 독점체제를 국유기업과 민간기업을 포함한 경쟁체제로 전환해야 하며, 시장에서의 자유로운 활동을 보장해야만 한다.

시늉뿐인 개방은 별효과가 없다는 것이 나진선봉지역 특구 개발사업에서 드러났다. 나진선봉지역을 특구로 설정한 지 올해로 10년째 되는데도 별성과가 없다. 오히려 그 10년 동안 북한 경제는 계속 나빠지기만 했다. 개방과 개혁에 대한 확고한 의지를 보이고 이를 국제적으로 인정받아야만 외국인 투자도, 기술도입도, 수출활성화도 가능해진다.

지금과 같이 소심하고 소극적인 태도로는 성과를 거두기 어렵다는 것이 대부분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그렇다면 개혁과 개방만 확실히 하면 북한 체제의 성공이 보장되나? 문제는 꼭 그렇지도 않다는 데 있다. 박정희나 리콴유 식의 개발전략이 됐든, 중국식의 개혁·개방정책이 됐든 필수조건은 북한이 전면적 개혁·개방을 추진하고 시장경제 체제를 도입해야 하는데 북한으로서는 이를 받아들이기가 그렇게 쉽지 않다. 북한은 지금까지도 전면적 개혁·개방이 전면적 체제위협으로 전화될 것을 심히 두려워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냥 망하느냐, 개방하다 망하느냐


 
 

남북정상회담과 6·15 공동선언으로 남쪽에서는 북한대개방의 물꼬가 곧 바로 터질 것 같은 분위기가 고조되고 있지만, 실제 상황은 그렇게 만만하지가 않다. 북한정부의 입장에서는 그들이 원하는 극히 일부 분야에서 그들이 허용할 수 있는 범위까지로 대외개방 폭을 제한할 가능성이 대단히 많은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제한된 개방은, 심지어 그 개방된 부문에서조차 큰 성공을 거두기 어렵다는 데 있다. 지난 10여년 동안의 경험을 조금이라도 유심히 보아온 북한 관리라면 누구나 이를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여기에 그들의 딜레마가 있다. 어쨌든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분명한 것은 개혁·개방과 체제수호라는 어떤 관점에서는 이율배반적으로도 보이는 두 방향 사이에서 왔다갔다하는 방식으로는 결코 성공할 수가 없다는 것이며 동시에 대단히 불행히도 북한 정부가 이러한 선택을 할 가능성이 가장 높다는 것이다. 이렇게 모호한 태도는 북한 정부에도 북한 인민에게도 그 어느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만약 북한 정부가 10년 전이나 혹은 20년 전에 ‘합영법’이니 ‘나진선봉 특구’니 해서 개방하는 것도 아니고 안 하는 것도 아닌 모호한 태도를 취하지 않고 과감하게 개방했더라면 경제적으로도 큰 성과를 거두었을 것이고 정치적으로도 체제붕괴 위험이 지금에 비해 훨씬 줄어들었을 것이다. 다만 지금과 같은 철권독재는 불가능하고 유순한 독재로 그 체제의 성격이 조금 바뀌었겠지만.

지금 북한에서 중국식 개방정책이 성공하겠는가 하는 문제와 별도로 북한이 중국식 개방정책을 받아들일 것을 간곡히 권유하고 싶다. 현재의 북한 정부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그렇게 많지가 않다. 중국식 개방정책을 받아들이는 것과 그냥 망할 때까지 기다리는 것 2가지 밖에 없다.

그냥 망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은 인민을 더욱 비참한 상황에 빠뜨리는 길이고 체제가 붕괴되고 난 후 역사적 단죄를 피할 수 없는 길이지만 개방정책을 추진하다가 체제가 붕괴되었을 때에는 그래도 동정을 받을 수 있는 여지는 있다. 그리고 앞에서 설명했듯이 중국식 개방정책이 성공할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이 아니다. 북한은 매우 특수한 나라기 때문에 다른 나라들의 경험을 기초로 북한의 앞날을 평가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앞으로 걸어가야 할 길이 전인미답의 길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잔재주를 부리지 않고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일관성 있는 개혁과 개방정책을 펴면 주위 나라들의 도움도 받을 수 있고 인민의 지지를 얻게 될지도 모른다. 개혁과 개방이 김정일정권에는 유일한 선택이요 시기적으로도 이번이 마지막 기회가 될 것으로 보는데 모든 것을 예단해서 지레 겁을 먹고 소심하게 나오지 말고 대담하고 대범하게 개혁과 개방의 큰 길로 나올 것을 간절히 호소한다.

 

 

진심으로 존중하고 조건없이 도와줘야


 
 

마지막으로 우리가 북한과 교류하고 협력하고 더 나아가 통일하는 과정에서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인지에 관해 꼭 언급하고 싶다.

우리는 북한 사람들을 진심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사랑과 존중하는 마음으로 대해야 한다. 우리는 북한과 북한 사람들에 대해 아무런 조건 없이 헌신적으로 도와주려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다시 말해 북한을 보다 적극적으로, 혹은 이런 표현이 적합할지는 모르지만, 공격적(?)으로 포용하고 끌어안아야 한다는 말이다. 나는 ‘통일비용’이라는 말에 대해 심히 불쾌감을 갖고 있다. ‘통일비용’이라는 말 자체에 뭔가 내키지 않지만 할 수 없이 돈을 낸다는 뉘앙스가 강하게 깔려 있는데다가 통일될 경우에만 도와주고 통일이 되지 않으면 돈을 내지 않겠다(대대적으로 도와주지는 않겠다)는 뜻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북한이 민주화되더라도 남한과 북한은 사회발전단계가 워낙 다르기 때문에 통일이 상당 기간 지연될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 이럴 경우 막대한 액수의 돈이 요구되는 북한의 SOC 건설 등 북한재건비용은 남한이 적극 도와주지 않으면 조달하기가 대단히 어렵다. 이를 적극 도와주려면 남한 주민의 많은 희생이 따르겠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조건 없이 헌신적으로 도와주어야 한다. 북한이 완전히 민주화되지 않은 조건에서도 어느 정도 민주화되고 지원금이 군사비 등의 용도로 전용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설 정도가 되면 조건 없이 대대적으로 지원해주어야 한다. 이해타산에 의한 것이거나, 마지못해 할 수 없이 내는 것이 아닌, 북한 인민을 사랑하고 존중하는 진심이 담겨 있어야 한다. 이러한 진심이 없으면 아무리 돈을 많이 내도 거리가 가까워지기 어려울 것이다.

구 서독 사람들이 엄청나게 많은 돈을 내어 구 동독 지역에 투자를 했지만 거기에는 사랑하고 존중하는 진심이 담겨 있지 않거나 아주 적게 담겨 있어 아직도 그들 사이는 가까워지지 않고 있다. 서독인들은 동독인들의 자존심을 제대로 배려해주지 못했고 동독인들의 이상과 열정과 노력과 좌절 등이 공정하게 평가되지 못했으며 동독과 관련된 모든 것이 멸시의 대상이 되었다. 그 때문에 통일 후 구 서독인들은 일방적으로 주기만 하고서도 구 동독인들에게 심한 욕을 얻어먹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독일의 경우를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하며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지금부터라도 북한 사람, 북한 말, 북한의 풍습 등을 진심으로 존중하도록 학생들을 교육하고 탈북자나 북한의 식량난민 등을 진심에서부터 우러나오는 사랑으로 도와주려는 운동을 더욱 확대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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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clsrodi [쪽지 보내기] 2016-07-27 11:52 No. 1271823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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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J 집권 때 시작하여 용두사미로 만든 후 일부 사면 복권 시켜 주었으며
놈현 집권 때 마무리 시켜서 사면 복권 시켜준 이후 국회의원까지 만들어준 사건 관계인들입니다.

이 사람들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요?

오마이뉴스 ㅡ 오연호
알라딘 ㅡ 조유식

그리고 나머지는?

큐리 [쪽지 보내기] 2016-07-27 13:16 No. 12718234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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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길군요. 다 읽을 시간이 날지 모르겠지만 올려주신 분의 성의도 있으니 시간나는데로 읽어 보겟습니다.
curi070
메트로마닐라
0906-461-6383
ramtam [쪽지 보내기] 2016-07-27 13:39 No. 1271823521
55 포인트 획득. 축하!
숨 멈추는줄 알았네요

한편의 소설 같은 흥미진진한 사건

잘 읽어 보았는데

변절자로 불리는 사람들도 있고

위장 신분도 있고

잠적 중인 사람들도 있네요

한번쯤은 정화 되어야 할듯
모퉁이 [쪽지 보내기] 2016-07-27 14:34 No. 1271823613
9 포인트 획득. ... 힘내세요!
기네요. ^^
ruru123 [쪽지 보내기] 2016-07-27 16:22 No. 1271823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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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정권 때 체포하고 구속 후 재판에 회부하고 사면 복권 해 준 사건이므로 그나마 간첩 조작 사건이라고는 말을 하지 못하는 유일한 사건인데.

김대중 정권과 놈현 정권 때 팍팍 밀어준 덕분에 완전 자리 잡은 곳들 많잖아요.

알라딘 조유식 ㅡ 국가에서 책 구입 때 유일한 통로였으니 성장 할 수 밖에 없었고
오마이뉴스 오연호 ㅡ 동일.

하영옥의 행방이 정말 궁금한데 전혀 나타나지 않고 있으며

말지 기자 하였던 ㅡ 김경환 근항도 정말 궁금한데....

이석기는 교도소 있으니 그렇다 하여도....
karleom [쪽지 보내기] 2016-07-27 18:06 No. 1271824368
36 포인트 획득. 축하!
7월 초중순에 가입된 아이디 여러개가 동시에 작업 중이군요.. 팀장한테가서 보고해. 여긴 너네가 생각하는 빨갱이 종북 그런사람 없으니 필고는 접자고. 그럼 짤릴가봐 겁나냐. 선거철도 아닌데 야들이 왜 갑자기 때거지로 움직이지...
Killkill [쪽지 보내기] 2016-07-27 21:05 No. 1271824955
37 포인트 획득. 축하!
@ karleom 님에게...

참 이상하시네.
뭐가 꾸린 것이 있으신가요?
익명성 뒤에 숨어서 ...

국내정치는 니편 내편 있으니 그렇다 하여도

북쪽 관련에 과민성이시네요.

왜 뭔 일 있어요.

그나마 나는 07월 가입자가 아니므로 님의 공격 대상에서는 벗어났네요. ㅎㅎㅎ
편하게살자 [쪽지 보내기] 2016-07-27 19:26 No. 1271824656
90 포인트 획득. 축하!
참 길기도 하네요 써 놓은거 복사 해서 이리 저리 올리는 거 다 알아요
편하게살자 [쪽지 보내기] 2016-07-27 19:26 No. 1271824658
1 포인트 획득. ... 쉬엄 쉬엄~
참 길기도 하네요 써 놓은거 복사 해서 이리 저리 올리는 거 다 알아요
sinar [쪽지 보내기] 2016-07-28 00:12 No. 1271825520
31 포인트 획득. 축하!
너무길어요. 나눠서 올리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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